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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대한제국 애국가와 1910년대 하와이 애국가
  2004/08/14 05:20
오두방정    조회 1864  추천 4
- 역사산책 -

대한제국 애국가와 1910년대 하와이 애국가


옆의 애국가는 윤치호가 1907년에 작사한 것으로 드러난 <애국가> 가사이다. 영국의 민요 ‘올드 랭 사인’곡에 맞추어 불린 이 애국가 작사가에 대하여 그동안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윤치호 작사설과 안창호 작사설이 대립되어 왔다.

먼저 안창호 작사설을 살펴보자. 한말 독립운동가인 안태국의 사위인 홍재형(洪在衡)이 안태국의 말을 회고하는 <안도산전서>의 내용에서 안창호 작사설을 유추하게 하는 내용이 있다.

주요한은 <안도산전서>에서, 애국가의 원래 끝구절은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임군을 섬기며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였으나 1919년도부터 상해에서 이를 지금과 같이 고쳐 부르기 시작하였고 이는 안창호가 고친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이광수가 저술한 <도산 안창호전>의 내용과도 일치한다. 이광수는 상해임시정부 정청(政廳)이 매일 애국가를 불렀으며, 역시 마지막 구절의 '임군을 섬기며'를 '충성을 다하여'로 도산이 수정하였고 이 노래가 널리 불려 국가를 대신하게 되었다고 서술했다.

이광수는 이 책에서 도산은 애국가의 작사자냐는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그렇다고 부인도 하지 않았지만 현재 애국가가 안창호의 작이 분명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안도산전서>에 따르면 현재의 애국가는 <대한제국 애국가>를 개사한 가사라는 것이다. 본래 애국가 가사의 첫 절이 '성자 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 산고 수려 동반도는 우리 조국일세'라고 되어 있었는데, 도산(島山)이 하루는 서울서 내려 온 교장 윤치호를 보고 이 가사가 적당하지 않으므로 고쳐서 부름이 좋겠으니, 교장께서 새로이 한 절을 지어 보시라고 청하자 윤치호가 도산의 생각을 물었고, 도산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구절을 보여주자 윤치호가 기뻐하면서 찬성하자 도산이 이를 당시 교장인 윤치호가 지은 것으로 발표하자고 제안하여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현재 쓰는 애국가 가사가 윤치호 작사에 보다 찬성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는 윤치호 단독 작사설을 심의했으나 ‘찬성 11, 반대 2’로 만장일치를 끌어내지 못해 결정을 유보했었다.

최근 조선일보(2004.08.13)에서 입수한 자료는 윤치호 작사설을 더욱 강하게 입증시키고 있다. ‘동해물과 백두산…’ 애국가 가사를 독립신문 사장과 대성학교 교장을 지낸 윤치호(尹致昊•1865~1946)가 작사자라는 사실을 밝힌 외국문헌이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국가상징연구회의 김연갑(金煉甲) 대표간사는 애국가 가사를 영문으로 싣고, 그 작사자를 윤치호로 명기한 ‘National Anthems―And How They came to be written’을 미국에서 입수하여 8월 13일 조선일보에 공개했다. 이러한 새로운 사료는 애국가 가사 작사자의 두 양대설인 안창호 작사설과 윤치호 작사설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한다.

조선일보에 공개된 ‘National Anthems…’ 책자는 미국적십자사가 1951년 초판에 이어 1952년 찍어낸 수정판. 미국 한국 영국 오스트리아 캐나다 프랑스 네덜란드 등 7개국 국가의 작사•작곡 배경을 다룬 책이다.


▲ ‘애국가’영문가사를 싣고 작사자를 윤치호로 밝힌 미국적십자사 발행 책자. 원 안은 '작사가는 윤치호'라고 설명한 문장을 확대한 것이다.

위의 사진에서 보는대로 이 책의 22•23쪽에서 저자 E R 그리피스(Griffith)는 ‘TONG HAI MAIN(동해바다)’ 제목 아래 애국가 1•2절 영문가사와 후렴을 싣고 작사자를 윤치호(Chiho Yun)로 기록하고 있다. 이 자료는 외국인 자료로서는 유일한 애국가 가사에 대한 자료이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에 기독교서지학자 신인수씨가 미국 LA종우서관이 1931년 펴낸 ‘윤치호 쟉(작)가 애국가’의 악보를 수록한 책 ‘셰(세)계명쟉(작)가곡집-무궁화’(조선일보 2003년 12월 17일자 A21면 보도)를 2003년 LA에서 입수해 공개하기도 했다.

이와같은 양대 작사설에 대하여 향후 보다 더 보강된 자료들이 나올 수도 있겠으나 현재 우리가 쓰는 애국가 가사는 본래 <대한제국 애국가> 가사에서 발전시킨 것이라는 점은 변할 수 없는 사실이다.

대한제국 애국가의 가사도 여러 버젼으로 표현되었던 것 같다. 본래 '상제'로 표현되었던 것을 후에 '하느님'으로 변화되기 까지 여러 과정을 밟아 온 것 같다. 애국가라는 것 자체가 대한제국 당시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그 가사의 '하느님'에 해당하는 '상제'가 나중에 현재의 애국가의 '하느님'으로 발전했을 당위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오늘자 인터넷 경향신문 보도에 의하면 애국가의 1910년대 하와이판에서도 '상제'란 말이 들어가 있음을 본다.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이동국 큐레이터가 1910년대에 하와이에서 발간된 애국가 악보를 최근 서울 인사동 고서점가에서 입수하여 13일 공개했다고 한다. 해외에서 불린 애국가가 악보와 함게 발굴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나라가 어려울 때는 그 자료들이 해외에서 보존 전승되는 수가 많다고 볼 때 해외 동포들의 애국에 대한 책임은 크다고 볼 수 있다.

하와이판 애국가는 KOREAN OLD NATIONAL HYMN (조선의 옛 국가)이라는 붉은 영문 제목과 함께 ‘죠션국가’라고 한글로 이름붙여 악보와 한글가사를 함께 담고 있다. 자료의 하단에 붉은 글씨로 '하와이 호놀룰루의 코리안 아메리칸 클럽'에서 발간했고 가격표도 25센트 표기가 있어 대량발행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다음에서 보듯이 그 가사의 내용을 살펴보면 윤치호의 애국가 가사와 비교된다.


< 죠션국가 >


샹뎨는 우리나-라를 도으-소셔

영원 무궁토-록

나라 태평하(아래 아)고

인민은 안락ㅎ(아래 아)야

위권이 셰상에 떨치-여

독립 자유 부강을 일신케합(아래 아)소셔

샹뎨는 우리나-라를 도으-소-셔.



'독립 자유 부강'을 내세운 것을 보면 나라를 빼앗긴 1910년대의 시대상을 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애국가 제정은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이 국가 상징물로 애국가의 필요성에 따라 1901년 의정대신 윤용선에게 국가(國歌) 제정을 명하였고, 윤용선은 조선 왕립군악대 지도자로 초빙된 독일인 프란츠 에케르트(1852~1916)에게 부탁하여 이듬해인 1902년 7월1일 작곡을 완료한다.

이렇게 볼 때 애국가의 가사에 작곡가의 서양적인 영향력이 미쳤을지는 알 수는 없으나 그 작곡은 분명 서양 음악으로 시작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대한제국 애국가'는 1902년 9월9일 고종 탄신일 기념식장에서 처음 연주되었고 이어서 관립학교, 군악대 등에서 연주되었다.

<오른쪽 옆의 대한제국 애국가 원본이다. 그러나 1902년에 발표한 '대한제국 애국가'는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인하여 금지곡이 된다. 그러나 해외에서는 애국가 부르기를 이어받고 따로 불렀던 것 같다. 그래서 1910년대 해외 판 애국가의 가사가 일제병합 이전 시대의 애국가 가사 내용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 대한제국 시기인 1904년 5월 13일 황성신문에 실린 애국가의 가사는 아래와 같다. <한국문화대백과사전> 제 14권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상제(上帝)난 우리 황상을 도우소서

성수무강하샤 해옥주를 산갓치 사으소서

위권을 환영(천하란 뜻)에 떨치샤

어천만세에 복록이 무궁케 하쇼셔

상제(上帝)난 우리 황제를 도으소셔


애국가가 기원의 의미로 들어간 것은 전통적으로 하늘에 제사하는 천구단의 제사의 제례악이나 나라의 제사때 제문과 연관한 기원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상제' 자체가 <시경>이나 <심청전>에서 말하는 '상제'의 계승일 수도 있으나 근대 기독교가 도래하여 '하느님'에 대한 표기를 한자로 하다보니 전래의 어휘인 '상제'를 사용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볼 때 애국가의 '하느님'은 기독교 입장 이상 전통적인 하늘의 천제나 상제에 대한 기원의식이 들어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글의 모두에 올린 사진에서 보는대로 현재 쓰이고 있는 '윤치호 작사'(1907) 안익태 작곡(1935)의 애국가는 본래의 '대한제국 애국가' 대신에 민간에서 지어 만들어 부른 노랫말로서 '국가'가 아닌 '애국가'였다. 윤치호가 그 현재의 가사를 지은 것은 1907년으로 볼 때 그것은 '대한제국 애국가'와는 별도로 따로 민간 애국가로 불려졌음을 알 수 있다.

이때 <대한제국 애국가>와 비교할 때 현재의 윤치호 작사의 애국가 가사에서 주목할만한 차이는 황제나 임금에 대한 표현은 없이 단순히 '하느님'이 우리나라를 보우하기를 기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것은 윤치호의 애국가 가사가 1907년에 작사했더라도 그 후 일본 합방을 통하여 변화된 가사가 남아진 것이 오늘의 우리 애국가 가사일 수도 있는 방증이 된다.

적어도 그것이 아니라면 아직은 합방이 되기 이전인 1907년에 임금에 대한 이야기가 빠진 것은 다분히 기독교적인 사고의식에서 '중보'인 예수와 '임금'에 대한 차이를 분명히 하려는 종교적 의식이 들어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그런 반면에 하와이 애국가에서 보듯 해외에 나와 애국가를 부른 것은 그 가사가 '대한제국 애국가'를 이어받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해외에 나와 있는 코리안들이 본국의 국가적 정통성을 이어가는 역할을 했던 것은 하와이 코리안 클럽에서 '대한제국 애국가'에 영향을 받은 노래가사 외에도 그 곡에서도 1935년 안익태가 오스트리아 빈에서 유학중에 현재의 애국가를 작곡한 것을 보더라도 '애국'은 해외동포들이 연면이 이어오는 또 하나의 전통이 있음을 본다.

광복이 된 후 해외의 '애국가'는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국가로 제정됐다. 1902년 '대한제국 애국가'는 언젠가 國歌 정비때에 애국가의 발전사에서 함께 다루어지면서 역사적 애국가로 연주되고 불려질 수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근대사를 다루는 사극에서는 대한제국 애국가가 불리는 장면도 삽입될만하지 않는가.

그런 면에서 현재 애국가는 물론 1902년 '대한제국 애국가'나 1910년대 하와이 동포들이 불렀던 애국가도 모두 함께 전통 음악의 하나로 조명되어지고 옛 國歌 의 의미로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08/13/04 오두방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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