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학교 2학년때 그런일을 겪고, 외할머니는 그 사실을 알고 기함을 하셨죠.
한 며칠을 식음을 전폐하고 끙끙 앓으시다가 그러다 하루는 무슨 생각을 하
셨는지 절 데리고 청우일심회를 찾아가셨어요. 그리고 그곳 법사님과 면담
을 하게 되었어요. ”
“ 법사라면...그 대성사라는 사람 밑에 있는 이들을 말하는건가 ? ”
“ 네, 맞아요. 대성사 밑으로 모두 열두명의 법사가 있고 그중 가장 고참 법
사를 ‘ 대법사 ’라고 불러요. 여하튼 절 면담하신 법사님은 거기서 사주와
전생록을 관장하는 분이셨는데...제 사주를 보더니 전생의 업이 많아 조상영
가의 해원을 풀어야한다면서...그러면서 저희 외할머니보고 천일기선을 드리
라 하셨어요. 그리고 저보곤 그동안 일주일에 한번씩 일요일마다 청우일심회
에 나와서 조상 영가의 해원을 푸는 천도제를 드리라 하셨죠. ”
“ 천일씩이나 ? ”
“ 네... ”
“ 천일이면...한 3년쯤 되는 시간 아닌가 ? ”
“ 네, 맞아요. 그동안 저희 외할머님은 청우일심회 부산회관에 사시면서 기선
을 드리고 그리고 전 일요일마다 회관에 나와서 조상천도제를 드리라고 하신
거였어요. ”
“ 유리양은 아버지가 이혼한후 외할머니 댁에서 살았다면서 ? ”
“ 네. ”
“ 헌데 할머니가 부산회관에서 천일기선을 드리면 그동안 집안살림은 누가 돌
보나 ? ”
“ 파출부 아주머니가 집안일을 봐주셨고요...외삼촌이 한분 계시기 때문에 그
분이 제 생계는 돌봐주셨기 때문에...그 점은 문제가 없었어요. ”
“ 그리고 그 3년동안 유리양은 매주 일요일마다 회관에서 천도제를 드렸단 말
이지 ? 그 청우일심회 부산회관이란 곳에서 ? ”
“ 네. ”
덕수는 참 기가막히다는듯이 유리를 바라본다. 세상에 참 별의별일이 다 있고 별의별 사연을 가진 사람이 다 있다지만 칠십평생 이런 기가막한 사연은 또 처음 들어본다. 하긴 박덕수는 천주교 신자였으니 다른 종교에 관해선 딱히 관심을 가질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었겠지만. 하지만 또 한편으론 30년간 정치를 하면서 별의별 사람을 다 만나보았고 종교계 사람들도 그중엔 적잖이 있었지 않은가. 그래서 청우일심회 어쩌구 하는 종교란 말을 유리가 할때도 증산도 계열쯤 되려니 막연히 짐작은 했는데. 정작 그 청우일심회 교주는 불교출신이라고 하고. 듣고보니 참 기가막힌 사연이란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 헌데 유리양은 지금...그 영월의...그 청우일심회 총무원이 있는곳에서 탈출했다
고 하지 않았나 ? 대체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랐고...따라서 조상 천도제도 그 부
산회관이란 곳에서 지내고 그랬다면서 어떻게 영월까지 가게 된거지 ? ”
“ 3년...천일기선이 지났지만...아직 조상영가의 해원이 다 풀리지 않았다고 대법
사님이 그러셨어요. ”
“ 대법사 ? 그 청우일심회의 최고참 법사가 말인가 ? ”
“ 네, 그리고 3년이 지났으니까 성폭행을 당했을때 중2였던 저는 어느덧 고2가
되어 있었고요. ”
“ 그랬겠구먼. 그럼...그 뒤엔 어떻게 되었다는 이야긴가 ? 천일기선을 다시 시작
이라도 한게야 ? ”
“ 그런건 아니고요... ”
“ 허면 ? ”
유리는 잠시 말이없다. 지금까진 그래도 술술 쉽게 꺼내기 어려운 사연을 잘 꺼내놓던 유리였지만 거기서 다시 말을 멈추는 것이다. 그리고 ‘ 흑~! ’하고 흐느낌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유리는 이내 두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감싸쥔다.
“ 아니, 저 유리양... ”
유리의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다. 덕수는 당황한듯 유리를 달래보려고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다독여보려한다. 하지만 유리는 뿌리친다.
“ 우는거에요 유리양 ? ”
“ 죄송해요...하지만...흑... ”
“ 아니...거...허허...참...아니 뭐 좋아요. 정 말하기 어려운 사연이면 다 말하지 않
아도 돼요. 하지만 듣고보니 참 기가막히고 딱한 사연이었구만 그래. 유리양도
참 힘들게 살았었겠고. ”
“ 24선녀중 한 사람으로 뽑히게 되었어요. ”
“ 뭐라구 ? ”
한참 흐느끼는듯 하던 유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것은 또다시 덕수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이건 또 무슨소리인가. 24선녀라니 ?
“ 총무원...청우일심회가 강원도 영월의 명당터에 총무원을 세운것은 그 무렵의 일
이었어요. 외할머니께서 천일기선을 다 마치셨을때의 일이요. ”
“ 그게 유리양이 고2때의 일이란말이지 ? 그럼 불과 얼마 안 된 일이겠구먼. ”
“ 2년전 일이죠. 전 금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니까요. ”
“ 그랬군. 헌데 대체 그 24선녀란건 또 뭔가 ? ”
“ 조상영가의 업연을 마저 풀려거든 저를 청우일심회에 바치라고 대법사님께서
외할머님께 말씀하셨대요...그런 사실은 전 최근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그리고
총무원을 세우면서 대성사님과 종단의 일을 보좌하는 24선녀를 뽑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 24선녀중 한 사람으로 저를 추천해보라는 제안을 대법사님께서 외할
머니한테 하신거에요. ”
“ 총무원에서 대성사를 보좌한다구 ? ”
“ 네. ”
다시 긴장이 되는 것일까. 유리의 목소리는 약간 떨리고 있었다.
“ 보좌라니까...저도 처음엔 바로 이상한 상상이 좀 들긴 했는데...그런건 아니고요.
가령 24선녀중엔 이런저런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리고 공양간에서
대중공양을 총괄하는 보살선녀님 같은 경우엔 연세가 80이 다 된 할머님이세요.
그리고 차량운행을 담당하는 선녀님도 있고요. 총무원에 종단 큰 행사가 있을때
차로 영월시내에서 총무원 있는곳까지 신도들을 태워나르는 그런 일을 하는 선녀
님이요. 그리고 재정을 담당하는 보살님의 경우도 40대의 중년 여성분이세요. 그
분의 경우엔 재정선녀님이고요... ”
“ 허허...그러니까...아무튼 그 총무원에서 일을 하는 스물네명의 여성이 있고 그걸
24선녀라 부른다 이 소리구먼. ”
“ 대충 그렇게 이해가 될수 있겠죠... ”
“ 허허...그러고보니...내가 이거 졸지에 선녀님과 대화를 다 나누게 된 셈이로구
먼. 허허...영월의 산속에서 이곳 경기도 이천까지 날아온 젊은 선녀님과 말이지.
”
덕수는 농담처럼 말해보았지만 유리는 그런 덕수를 쏘아본다. 어찌되었든 유리에겐 상처가 된 일 아닌가. 그런데 너무 농담조로 가볍게 받아들이는 것 같아 원망이 약간 담긴것이다.
“ 아아...이거 미안해요...아무튼 유리양 입장에선 상처가 된 일이었을텐데...어쨌든
그럼 유리양은 그게 싫어서 그곳을 탈출했다 그 이야긴가. ”
“ 그런것도 있고요...또... ”
“ 또 뭐 다른 이유가 있었던건가 ? ”
하지만 유리는 다시 입을 다물고 만다. 나이는 어리지만 뭔가 사연많고 한많은 여인임에는 틀림없는것 같다. 그나저나 이제 이 여인을 대체 어찌하면 좋을까. 태어나고 자란곳은 부산이라고 했지만, 청우일심회 총무원이 있다는 강원도 영월에서 탈출해 나온 여인이고, 그리고 지금 여기는 덕수의 별장이 있는 경기도 이천이다. 유리가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하면서 가족 이야기를 대충 언급하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가족한테 바로 연락하거나 그럴수 있는 상황은 아닌듯 하다. 그녀의 아버지는 유리가 세 살때 이혼했다고 했고, 외할머니는 청우일심회란 종교단체에서 천일기선을 했다고 하지 않는가. 허면 대체 이 여인의 신병을 지금부터 어찌 처리해야 하면 좋은가.
“ 유리양... ”
일단 덕수는 유리의 마음을 안정시키려는듯 온화한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 내 잠깐 이야길 했지만...난 30년동안 정치를 해 온 사람이에요. 그러면서 별의
별 사람을 다 만나보긴 했지만...유리양도 참 딱하고 힘든 사연을 가진 사람이로
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
“ ...... ”
“ 그리고 또 한편으론 나 자신에 대한 반성도 했고요. 유리양 같은 사람이 그렇
게 힘들게 살아온것도 다 우리 정치인들이 정치를 잘못해서 이 지경까지 온 것
이 아닌가 하는 반성과 자책도 들었고요. ”
별다른 대꾸할 말은 없는지 유리는 덕수의 말을 잠자코 듣고만 있다. 덕수의 말이 이어진다.
“ 헌데 유리양. 유리양은 내가 누군지 정말 모르겠어요 ? ”
“ 모르겠는데요. 누구신데요 아저씬 ? ”
“ 허허...이런...아직 나이어린 소녀이니 나에대해 잘 모를수 있을거란 생각은 했
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박덕수를 모른다니 서운해지는걸 ? 나도 한때 잘 나가는
그것도 차세대 지도자감으로 1,2위에 오르내리기도 하고 그런 사람이었는데말이
야... ”
“ 아저씨가요 ? ”
믿겨지지 않는다는듯한 투로 유리가 묻는다.
“ 가만있자 그럼...유리양이 이렇게 자신에 대해 세세하게 이야기했으니 공평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내 소개를 정식으로 하는게 좋겠네. 이름은 정식으로 말한것 같
긴 하지만. 내 이름은 박덕수라고 해요. 유리양, 유리양은 혹시 87년에 있었던 6
월항쟁에 들어보았나요 ? ”
“ 학교에서 역사시간에 배운것 같아요. ”
1987년에 있었던 6월항쟁을 역사시간에 배웠다니. 유리의 말에 덕수는 잠시 기분이 묘해진다. 벌써 세월이 그렇게까지 흘렀단 말인가.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시위가 온 나라안을 뜨겁게 달구었던 그 시절. 군사정권의 종식을 원하는 보수중산층과 특히 화이트칼라의 집단적인 궐기가 있기도 했던. 그게 벌써 21년전의 흘러간 과거다. 요즘 10대들이야 당연히 현대사 시간에나 배울수 있는 그런 역사속의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그 당시 치열한 역사의 현장 한가운데 있었던 박덕수 같은 사람에게야 아직도 엊그제의 일처럼 생생한 기억일테지만.
“ 박정희로부터 전두환에게까지 이어지는 17년의 길고 지루한 군사정권 기간이었
고, 게다가 박정희는 그나마 경제발전이란 업적이라도 있지만, 광주의 참극을 일
으키고 집권한 전두환의 7년은 참으로 말많고 탈많은 세월이었지. 그랬기에 야당
과 재야 그리고 시민사회에 이번엔 정말 문민정부를 열어야겠다는 열망이 그 어
느때보다도 뜨겁고 절실했었고... ”
덕수의 얼굴에 회한이 서린다. 새삼 그 시절의 일들이 떠올려지기라도 하는듯.
“ 하지만 양김으로 대표되는 두 야당지도자는 후보 단일화란 국민의 열망을 저버
리고 끝내 제각기 출마를 감행했어요. 게다가 박정권 시절 2인자였던 김종필씨까
지 정계에 복귀 3김시대를 열며 망국적인 지역할거 정치가 막을연게 그때이기도
했지. 그때 야당후보 단일화를 요구하며 끝까지 재야에 남았던 다섯명의 정치인
이 있어요. 허허허...그 다섯명의 이름은 아직까지도 잊어버리기가 쉽지 않구먼 그
래. 홍원석,이순철,조현종,김명수...그리고 이 부족한 박덕수가 외람되게도 그 후보
단일화 요구 5인방의 말석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죠. 삭발까지 단행하며 그렇게
후보 단일화 요구를 했건만, 끝내 무위로 돌아갔고. 87년의 대선은 결국 어이없
게도 민정당 노태우 후보의 승리로 끝났지만... ”
“ ...... ”
“ 88년에 여소야대 정국이 되면서 5공비리와 특히 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진상
규명을 위한 청문회가 있었죠. 난 그 광주청문회에서 무소속 의원으로 활약하기
도 했었고... ”
혼자만의 이야기가 좀 장황하게 이어지자 유리에게 미안한 감이 들었는지 덕수는 잠시 말을 멈춘다. 유리도 덕수의 이야기에 그런대로 흥미를 느끼는지 눈빛이 초롱초롱하다.
“ 허허허...이런...본의 아니게도 내 개인적인 이야기가 장황하게 이어졌구먼 그래.
결국 자화자찬에 불과한 부끄러운 이야기가 말일세. 언론은 그때 날 송구스럽게
도 청문회 스타 반열에 올려주기도 했지만...아쉬움이 많이 남은 청문회였어요. ‘
모릅니다 ‘, ’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로 일관하는 청문회 증인들 앞에서 밝혀낸
들 뭘 얼마나 밝혀낼수 있었겠나. ”
“ ...... ”
“ 그후에도 난 두가지 신념. 망국적인 지역할거정치를 하는 3김정당엔 결코 합
류하지 않겠다, 그리고 둘째로 무엇을 하든 항상 국민의 편에서서 판단하고 행
동하겠다. 그 두가지 원친과 신념을 지키고자 노력했어요. 92년 YS와 DJ가 여
야의 대표주자로 나와 진검승부를 벌인 그때 필마단기의 군소후보로 대선출마
를 감행했을때도, 95년 서울시장에 도전할때도. 그 일관된 소신과 신념이 있었
어요. 허허...워낙 이합집산이 잦은 우리네 정치판이다 보니...3김 정당에 합류
를 거부하려다 보니 본의아니게 그 기간동안 나도 꽤 여러차례 당적을 변경하
거나 이탈했지만 말이지. ”
이제 유리는 박덕수가 어떤 인물인지 대충 짐작이나 감이 오는걸까. 덕수가 정치권에서 잊혀진것이 대략 90년대 후반경의 일이니 벌써 10년전의 일. 10년 세월을 야인으로 잊혀져있던 박덕수인데. 열아홉살 유리가 그에 대해 제대로 알기를 기대하는것은 아무래도 무리다. 무엇보다 박덕수가 청문회 스타나 차세대 지도자로 각광받던 시절은 유리가 갓난아기때거나 그녀가 태어나기 전의 일 아닌가. 특별히 정치에 관심이라도 많이 갖고 있었다면 모를까. 열아홉살 여인이 그 시절 박덕수가 어떤 소신과 신념을 갖고 활동한 정치인이었는지 100퍼센트 제대로 이해하는것은 무리다.
“ 여하튼 난 나름대로 망국적인 지역할거 정치를 어떻게든 고쳐보려고 노력한
사람중 하나에요. 외람되지만 유리양도 그런 나에 대해 조금은 이해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그런 이야길 좀 장황하게 늘어놓은거고. 보시다시피 이제 내 나
이도 어느덧 칠순이에요. 허허허...차세대 지도자로 각광받으며 세대교체를 부르
짖던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내가 70이라니. 요즘은 그저 세월의 무상함만을 느
낄뿐이죠. ”
“ ...... ”
“ 가만 그러나 저러나...유리양은 이제 어찌할 셈인가 ? 부모님이 이혼하셨다니
그쪽으로 연락하기도 어려운 상황일것 같고. 부모님과는 그럼 그후 쭉 연락이
안된건가요 ? ”
“ 아버진 세 살때 이혼하신뒤 연락이 끊긴거고요, 어머니도 그후 얼마안가 재혼
하셨는데...이혼사실을 숨기고 결혼한거기 때문에...제가 어머니 앞에 나타나선
안되는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외할머니 댁에서 자라난거고요. ”
“ 허허...그렇군. 그렇다면 이거 부모님한테 연락할 상황은 못 되지 않는가. 이런
상황에서 한 10여년만에 불쑥 아버지나 어머니앞에 나타날수도 없는 처지고...
”
덕수의 말에 유리는 새삼 자신의 처량한 신세가 실감이 난다. 무작정 그렇게 죽기살기로 청우일심회를 탈출한건데 이젠 그야말로 오갈데 없는 집도절도 없는 신세가 아닌가.
“ 참...외할머니는 ? 그리고 그 외 다른 친척은 그럼 전혀 없는건가 ? 외삼촌이 한
분 계시단 이야기를 아까 한거 같은데... ”
“ 외삼촌이...외할머니를 모시고 지금껏 살아오셨던거죠. 하지만... ”
“ 하지만 ? ”
“ 말씀드렸잖아요. 부산회관에서 천일기선을 하셨다고요. 거기서 그냥 사신거라
니까요. ”
말이 천일기선이지 3년 세월 아닌가. 그동안 유리의 외할머니는 청우일심회 부산회관에서 기거하다시피 한것이란것이 유리의 설명이었다. 쉽게 불교의 절같은 곳에 비유를 하자면 그곳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보살같은 생활을 했다고 보면 된다. 그러니 유리에게 설사 외삼촌이 있다고 해도 그 외삼촌이 어머니인 외할머니를 모시고 산 것은 아니지 않는가. 다만 유리 혼자 눈칫밥을 먹으며 외삼촌댁에서 더부살이를 해 온 모양새가 되었던 것이다. 적어도 유리 외할머니가 부산회관에서 3년 기거를 하던 그 시간동안은 말이다.
“ 어차피 오늘은 늦었으니 여기서 자도록 해요. 빈방을 하나 내줄테니까...아 !
그게 아니라 아까 내가 유리양을 임시로 눕혀놨던 그 방에서 자면 되겠군.
그리고 내일 날이 밝으면 유리양 거취 문제에 대해선 다시 의논을 해보도록
하지. ”
오늘은 일단 여기서 자도록 하라는 덕수의 말에 유리는 몇 번이고 고맙다는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사실 무작정 청우일심회를 탈출했던것이지 그때도 어디로 갈것인지에 대해선 전혀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무조건 청우일심회 총무원에서 멀리 떨어져야겠다는 생각에 며칠밤을 산길만 걷고 또 걸었을뿐. 그러다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 아래로 내려와서 여기 이천의 박덕수의 별장 뒤에서 쓰러지게 된 것이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청우일심회에서 생활하기 전까지의 유리의 부산 집으로 갈수도 없는 상황이다. 물론 집으로 연락한다는것도 말이 안 되고. 덕수의 집에서 일단 하루를 묵으면서 한숨을 돌릴수 있게 된 사실에 유리는 마음이 놓인다.
한편 덕수는 유리가 입을 간단한 속옷가지와 잠옷을 내주기도 했다. 여태까지 청우일심회를 탈출할 때 입고 있던 흰색 한복차림이었던 유리다. 목욕을 하고 덕수가 내준 잠옷으로 갈아입고는 그가 쓰도록 허락한 방 침대에 풀썩 쓰러진다. 그리고 잠이 든다.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깬 덕수는 부엌에서 들리는 달그락소리에 의아해서 그쪽으로 가 보았다. 놀랍게도 유리가 그곳에서 아침준비를 하고 있었다.
“ 아...아니 유리양 ? ”
“ 안녕히 주무셨어요 ? ”
약간 쑥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덕수에게 인사하는 유리. 식사준비를 하고 있는 유리의 모습에 덕수는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 아니 이거...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
“ 냉장고에 있는 야채랑 이런것들로 간단한 국거리를 만들었어요. 곧 아침준비가
다 끝나니 드세요. ”
“ 허허...이런 이거 이럴필요까진 없는데. 그것참...아무튼 일단 고마워요 유리양. ”
사실 한편으론 유리가 임의대로 자신의 별장 부엌 냉장고등에 손을 댔다는것이 거슬리기도 한 덕수다. 정계를 떠나 이천 별장에서 10년 가까이 은거생활을 하면서 이곳에서 쓰는 자신의 물건을 남이 손을 대는건 좀 싫어하는 습관이 생긴 덕수이기도 하다. 여하튼 유리의 성의를 생각해서 그가 차려준 아침으로 식사를 하게된다.
“ 그래...어젠 편안히 잘 잤어요 ? ”
“ 네. ”
밝은 표정으로 대답을 하는 유리. 하룻밤을 자고 났더니 어제보다 많이 밝고 활기가 보이는 유리이기도 하다.
“ 근데 쓸쓸하지 않으세요 이런데서 이렇게 혼자 사시면 ? ”
“ 그렇게 생각되나요 ? ”
“ 아니란 말씀이신가요 ? ”
“ 그렇게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30년 가까이 정계에 몸담고 있으면서 나름대
로 이런저런 상처도 많았기에 세상 근심을 다 잊고 이런데서 생활하는게 오히
려 속 편해요. 게다가 가끔 마을에 나가서...농사철때는 농사짓는 고향 어르신
들 일손도 가끔 도와드리고...마을 사람들과 가끔씩 막걸리라도 한잔 하면서 이
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시골사람이 다 되어가고 있더군.
그런 생활이 이젠 내게 몸에 밴거지 뭐. ”
“ 그러셨구나. ”
덕수는 미소를 살짝 지어보았다. 민주화 투쟁시절 야당후보 단일화를 외치며 삭발까지 감행하기도 했고, 청문회 스타로 뜨면서 3김청산과 세대교체를 외치기도 했던 그. 그런 덕수에게 어찌 정치에 대한 미련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고 말할수 있을까. 더욱이 그것도 망국적인 지역할거정치와 3김시대를 청산하겠다며 온몸을 내던졌다가 오히려 늘상 정치권의 아웃사이더로만 머물렀던 그의 정치일생임에랴. 더욱이 결과적으론 그 역시 여러차례 정당을 바꾼 정치인이 된 것이기 때문에, 그에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을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물론 박덕수야 나름대로 3김의 지역할거 정치에 합류하지 않는다는 명분이 있었던 것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론 처녀가 애를 배도 할말이 있다는 이야기처럼. 그런식으로 따지다보면 당적변경에 대한 핑계나 사연이 없는 정치인도 거의 없을것이다. 어쨌거나 박덕수의 나이도 이제 70이니 다시 정치를 재개한다는것도 물리적으로 힘든 나이이긴 하다. 더욱이 한때 세대교체를 주장하던 그였으니, 그런 그가 나이 70에 국회의원이든 대권이든 재도전을 한 대서야 말이 되는가. 따라서 차라리 복잡한 세상사를 모두 잊고 이렇게 초야에 묻혀 사는것이 덕수로선 속편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 헌데 그럼...자녀분들은 서울에서 따로 사신다고 하셨던가요 ? ”
“ 큰딸과 둘째딸은 이미 오래전에 시집가서 서울에서 남편과 함께 살고 있고, 막
내아들은 서울의 집에서 살고 있지. 내가 이천으로 내려오기 전에 살던 서초동의
내 집 말일세. ”
“ 그러시구나. ”
“ 아들녀석은 나이가 이제 서른인데 아직 미혼이야. 10년전에 시집간 큰 딸네미
야 이제 불혹이 다 되어가고...그렇게 2녀 1남이 있는거지. ”
“ 네에... ”
유리는 고개를 끄덕인다.
식사를 다 마쳐갈때쯤 인터폰 소리가 들렸다. 덕수는 인터폰을 받는다.
“ 여보세요. ”
“ 저...김태원입니다. ”
“ 어...아니 ? 벌써 왔는가 ? ”
“ 허허허...박의원님이 먼저 절 찾아오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
“ 하하...그거야 그렇지만. 이렇게 아침일찍 오다니. ”
덕수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인터폰에 있는 자동문 여는 스위치를 누른다. 그리곤 거실 소파에 앉아있는 유리에게 말한다.
“ 실은 오늘 손님이 오시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어. 유리양한텐 깜박잊고 말을 하
지 못했지만 말야. 하긴 뭐...어제 어디 내가 유리양한테 한가하게 그런 이야기까
지 할 그런 상황은 아니었긴 했지만말야. ”
“ 저...전 그럼 방에 들어가 있을께요. ”
공연히 폐가 되는것은 아닐까 싶어 유리는 일어나 방에 들어가겠다고 한다. 하지만 덕수는 그럴 필요까진 없다고 말한다.
“ 아녜요. 그럴것까진 없어요. 기왕 이렇게 된거 간단하게 인사라도 나누는것쯤은
어렵지 않은일 아니겠다. 게다가 죄 지은 사람도 아닌데...숨을 필요가 뭐가있어.
어려운 손님은 아니니 그냥 간단히 인사나 드리도록 해요. ”
하긴 숨는것 자체가 별 의미가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인터폰을 눌렀던 사람은 어느새 별장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으니 말이다. 덕수는 별장안으로 들어선 사람과 인사를 나눈다.
“ 아이고, 이거 어서 오십시오 김태원 선생. ”
아까 인터폰으로 대화할때는 남자에게 하게체를 쓰는것 같더니 이번엔 그를 ‘ 선생 ’이라 부르는 박덕수다. 김태원이라 불린 남자도 덕수에게 정중히 인사를 한다.
“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박의원님 ? ”
“ 별고야 뭐 있었겠나. 헌데...김선생은 아직까지도 나한테 박의원인거요 ? 내가 정
계를 떠난지가 언젠데 허허허... ”
“ 뭐 어떻습니까 ? 제겐 여전히 박의원님이란 호칭이 더 익숙한 것을요. ”
유리의 입장에선 두 사람이 대체 어떤 사이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덕수는 존칭과 하게를 적당히 섞은 말투로 남자를 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핏 외양으로 봐선 두 사람의 나이차이가 그리 많아 보이지 않기도 하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덕수는 그 대신 대체로 깔끔한 인상이었고, 반대로 마른체구의 김태원이란 남자는 주름이 여기저기 깊게 패어있었기 때문이다.
(3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