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모님이... ”
이야기를 시작해보려다 정화는 잠시 물을 한모금 마신다. 그리고 다시 침착한 어조로 승규에게 말을 건넨다.
“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때 돌아가셨다고 했던가요 ? ”
“ 네. ”
그 이야기 역시 시사랑 시절 승규가 게시판에 몇 번 언급을 했던 이야기다. 여하튼 pc통신 동호회에서의 교류는 대개 게시판의 게시물이나 대화방에서의 채팅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니까. 그때 승규가 자유게시판이나 일기장등에 종종 언급했던 이야기들중 기억나는것들을 조합해 승규에게 그렇게 말을 건넨것이다.
“ 많이 힘들었었겠네요. ”
“ 그땐 아무래도...여러가지로 많이 힘들고 감당하기 어려웠었죠. ”
정화는 승규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숨을 내쉰다. 정화야 승규가 시사랑 시절 일기장에 올리던 수기 내용을 기억하고 있다. 극심한 왕따에 시달리던 사춘기 시절의 이야기에 대해. 그래서 나중에 오프라인 모임에서 만났을때도 승규에게 친절하게 잘 해 주었던 정화이기도 하다. 헌데 바로 그 승규와 이렇게 재회하게 되니 그녀의 착잡함이 오죽하겠는가.
“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
아무리 그래도 스무살이나 어린 올해 겨우 열여덟살이 된 자신의 딸 서현과 결혼하겠다니 그점은 그저 기가막힐 따름이다.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승규에게 말을 건넨다.
“ 작가일은 그래...잘 돼요 ? ”
“ 네. ”
어쨌든 요즘 한창 잘 나가는 스타작가라지 않는가. 그러니 50부나 되는 사극 집필도 맡았던 것이겠고. 인터넷에서 검색해본 승규와 관련된 기사에도 한창 주목받는 젊은 작가란 칭찬일색의 내용들이었다.
“ 돈도 많이 벌었겠네요 ? ”
이런 질문은 막상 정화도 하고나니 우습다. 아니 지금 이 상황에서 승규한테 이런 질문을 할 의미나 이유가 있는건지 정화 자신도 이해가 안간다. 막말로 돈많은 남자니 안심(?)하고 딸 시집보낼 그럴 정화도 아니고. 대체 이런 질문은 무엇 때문에 한 것인지.
“ 난 어쨌든... ”
다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이어가는 정화.
“ 시사랑 시절에 승규님 수기 다 읽어보았던 사람이에요. 그러니 그만큼 승규님
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안다면 알 수 있는 사람이고... ”
“ ...... ”
“ 제가 지금 이런 이야기 하긴 좀 그렇지만...솔직히 시사랑 시절에 여성 회원들
승규님에 대해 뭐라고 했는지 알고는 있어요 ? ”
“ 뭐라고...했는데요 ? ”
비단 시사랑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어찌 평가하는지는 누구나 궁금해 할수밖에 없는 문제다. 더욱이 승규의 경우는 살아온 과정이 그랬기에 타인의 자신에 대한 평가에 대해 예민하게 신경쓰는 일이 많았다.
“ 승규님이 상처받을지 모르겠지만...그때 여성 회원들끼리 번개모임을 가졌던 적
이 한번 있어요. 그때 어쩌다 승규님 이야기가 나왔는데...다들 그러더라구요. ‘
좀 불안해 보이는 사람 ’이라고... ”
승규는 별다른 반응이 없다. 시사랑이든 어디서든 어쨌든 그 당시 자신이 교제하고 교류하던 사람들이 좋게 평가할 것이란 기대는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러니 자신을 불안한 사람이라고 했든 뭐라 했든 승규로선 그다지 크게 동요할 이유가 없다. 정화의 말이 계속된다.
“ 뭐 한 열댓명 모인 모임자리에서 두어명 정도 제외하곤 다들 그렇게 언급했으
니, 변명의 여지는 없는거죠. 여하튼...그래요 뭐...전 어쨌든 승규님 수기를 읽어
본 사람이니 어쨌든 승규님 마음과 입장을 이해해보려는 생각도 했었고... ”
“ ...... ”
“ 아무튼 지금 이건 정말 너무하잖아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승규님이 제
딸을... ”
생각하면 할수록 분한 일이라 정화의 언성이 다소 높아진다.
“ 설사 제 딸이 철없어 승규님한테 결혼하자 조르고 보챘다 하더라도 어른인 승
규님이 좋은말로 타일러 집으로 돌려보냈어야 하는거 아니에요 ? 어떻게 한두
살도 아니고 낼모래가 40인 어른이... ”
“ 그 부분에 대해선 장모님께서 뭐라 말씀하셔도 변명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
“ 그...장모님 소리좀 하지 말아욧 ! 소름 돋겠네 정말. ”
그러고보니 며칠전 서현과 함께 처음 집에 왔을때도 조금의 거리낌 없이 정화에게 ‘ 장모님 ’이라 호칭했던 승규 아니던가. 그렇다고 이게 어디 정화가 ‘ 어이구 그래 우리 사위 ’ 할 수 있는 상황인가. 더욱이 정화와 승규는 어쨌든 시사랑 시절엔 누나,동생 하며 지냈던 사이기도 하다.
“ 서현일 처음 드라마에 데뷔시켰을땐...그땐 정말...서현이가 정화님 딸일거란 생
각은 꿈에도 못 했고...그때 아역배우가 펑크가 나...교통사고로 더 촬영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기에 대타가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
“ 됐어요 ! 그 이야긴 이미 다 아는 이야기고 ! ”
서현이 교통사고로 촬영을 할 수가 없게된 아역배우 대신 대타로 아역연기를 하게되어 방송에 데뷔하게 된 과정이야 정화가 어찌 모를까. 그러니 그 이야긴 지금 새삼스럽게 승규가 늘어놓을 필요는 없는것이고. 오락프로로 막 뜨다가 막말 파동으로 방송출연 정지를 당한 서현을 위로해주기 시작하다 사랑이 싹텄다는 고백을 결국 승규는 정화에게 하고야 만다.
“ 이제사 드리는 말씀이지만 서현이의 그런 모습을 보고 대인관계에 적응을 못
해 방황하던 제 20대 초반 모습을 보는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서
현이에게서 어떤 동질감을 느꼈다고나 할까요 ? 서현이의 방황하고 힘들어하는
심정을 이해할것 같기도 하고... ”
“ 그래서 우리 딸애를 위로해주다가 사랑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단 말이에요 ? 서
현이에게서 동질감을 느껴서 ? ”
“ 예... ”
정화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는게 부끄럽고 면목이 없어 고개는 숙였지만 대답 만큼은 또렷하게 하는 승규다. 정화는 다시 그런 승규를 딱하다는듯 바라본다.
“ 뭐 그마음 솔직히...이해가 갈것 같긴 하네요. 사실 저도 지금 저희 신랑과 연
애시절 사랑이 싹텄던게 취미도 같고 기호도 같고...뭐 여하튼 두 사람이 함께
공유할수 있는 부분이 많아서 친구처럼 어울리다 그렇게 된거니까... ”
캠퍼스 커플로 만나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바로 결혼하고 그 이듬해 서현을 나은 정화부부다. 결혼후 종교문제 때문에 갈등이 생겨 그 고민을 한때 승규에게 토로하던 정화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정화 부부도 학창시절 사랑이 싹텄던게 그런 과정이었던 것이다. 처음엔 친구처럼 만나다가 취미도 같고 비슷한 점도 많아 쉽게 마음이 통해 어울리다 연인관계로 발전했단.
“ 하지만 그거랑 이건 분명 경우가 다르잖아요. 어쨌든 서현인 스무살이나 어린
어린애에요. ”
“ 그점은 정말 뭐라 말씀하셔도 변명할 말이 없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장모님
... ”
“ 그 장모님 소리좀 하지 말라니깟 ! ”
성질같아선 정말 테이블위에 놓인 물컵을 승규한테 확 끼얹고 싶은 심정이다. 한때는 누나,동생 하며 어울리던 사람한테서 장모님 소리를 들으니 진짜 소름이 다 돋을 지경이다.
“ 다른건 몰라도 저 서현일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다른건 몰라도...자...아...아니
어머님...정화님. 다른건 몰라도 지금 제가 서현일 사랑하는 그 마음만은 진심입
니다. 그것만은 믿어 주십시오. ”
결국 승규는 무릎까지 꿇고 정화에게 애원한다. 정화로선 정말이지 이 상황에서 대체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미칠것 같은 심정이다. 일단 승규보고 자리에 앉으라고 타이른다. 무릎을 꿇은 자세로 두어번 더 애원의 말을 하던 승규는 그런 정화의 말에 의자에 앉는다.
“ 그래요 뭐 솔직히... ”
“ ...... ”
“ 학교에서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하고 따돌림 당하는 우리 딸애를 보면서
솔직히 그때 승규님의 수기가 가끔 떠올려지기도 했어요. 승규님도 왕따였고 우
리애도 왕따고...둘이 닮은 구석이 있긴 하죠. 그건 인정해요. ”
승규는 아무런 말이 없다. 정화의 말이 이어진다.
“ 하지만 그렇기 때문이라도 승규님이 더더욱 서현일 타일렀어야 옳았던거 아니
에요 ? 어떻게 승규님이 먼저 서현이한테 그럴수가 있어요 ? 어쨌든 승규님은
우리 애보다 20년이나 더 산 인생 선배에요. ”
“ 그 점은 그저 면목이 없고 드릴말씀이 없습니다. 하지만 정말...서현일 만나고
서현이의 상처를 위로해주고 함께 이야기 나누면서...그 과정에선...저도 서현이
에 대해 타오르기 시작한 그 불꽃같은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었습니다. ”
“ 그래요 뭐. ”
“ ...... ”
“ 이런 이야기까진 하기 뭣하지만 그래서 승규님은 아직 어린거에요. 인간이 나
이 그쯤 되었으면 자기 감정을 조절할줄도 알아야지...특히 이성앞에선... ”
힐난조로 말하고는 정화는 다시 물을 한모금 마신다. 어느덧 컵에 물이 다 비워져 웨이터를 시켜 물을 한잔 더 달라고 주문까지 해 그 한잔마저 다 비운다.
“ 한가지만 물어볼께요. ”
“ 예, 정화님. ”
장모님 소리를 또 입에 붙였다간 진짜 정화한테 벼락맞을거 같아 겁에질린 목소리로 ‘ 정화님 ’이라 부른다.
“ 우리 서현이...정말 첫 여자인거에요 ? ”
“ 예 ? ”
“ 우리 서현이...정말 승규님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이성으로
느낀 그런 여자아이냐구요 ? ”
시사랑 시절 승규가 게시판에 올렸던 수기를 읽어보았던 정화다. 학창시절에도 친구도 별로 없었고, 20대 성인이 되어서도 직장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 번번이 짤리기 일쑤였다던 승규. 그런 승규라면 지금까지 제대로 여자친구 같은걸 사귀어볼 기회도 없었을것 아닌가. 승규같은 처지의 남자를 좋아할만한 여자가 있었을것 같지도 않고. 그래서 물어본 질문이다.
“ 예. ”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승규.
“ 정말 이성으로써의 감정을 느껴본건 서현이가 처음입니다. ”
그런일이 있은 며칠후, 방송국에서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온 승규는 깜짝 놀랐다. 현관에 눈에 익은 신발 한 켤레가 놓여져 있었다. 자신의 신발은 분명 아니고 서현의 것임은 대번에 알아볼수 있었다.
서현과의 관계가 한창 무르익어갈 때 승규는 서현에게 자신이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집 열쇠를 하나 복사해 준 적이 있다. 서현의 생일날 승규 집에서의 파티도 그래서 할 수 있었던 것이고. 처음 방송활동 정지를 당하고 한창 힘든 상황에 있을때 승규가 한번 만나 이야기나 해 보자고 연락을 했었고, 그 뒤 서현이 고민이 있으면 늘 승규에게 연락을 해오자 그런 과정에서 승규가 열쇠를 하나 복사해주며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생일때 일을 제외하곤 서현이 진짜로 승규가 없을때 집 문을 열고 들어온 일은 없었다. 헌데 이번엔 정말 승규가 외출중일때 서현이 열쇠로 문을 열고 집에 들어왔다는 이야기 아닌가. 이 어찌 놀라운 사실이 아닐까.
“ 서현아... ”
불러보며 집안을 두리번거려 보았지만 서현이 보이지는 않았다. 설마하며 자신의 방으로 다가가보았다.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서현은 자신의 침대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 모습에 순간 승규의 가슴이 다 두근거릴 지경이었다. 반바지 차림이라 서현의 늘씬한 두 다리가 먼저 승규의 눈에 들어왔다.
“ 서...서현아... ”
“ 오빠... ”
승규의 목소리에 서현은 바로 고개를 들어 그를 본다. 그리고는 바로 침대에서 내려와 승규에게 와락 달려들어 안긴다. 서현의 눈엔 눈물이 고여있다.
“ 오빠...보고 싶었어요... ”
“ 서...서현아... ”
“ 오빠아... ”
“ 서현아...왜 이래 ? 무슨일이 있는거야 ? 진정해 일단...진정해 서현아. ”
일단 서현을 달래본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서현의 눈 언저리를 손수건으로 닦아주고 그녀에게 말을 건넨다.
“ 왜 ? 무슨일이야 갑자기 ? 무슨 잘못된 일이라도 있어 ? ”
“ 오빠... ”
승규를 불러보곤 서현은 정작 그의 질문엔 대답없이 엉거주춤 그 자리에 서 있다. 혹시하는 생각이 들어 승규는 방안을 잠시 둘러본다. 커다란 짐가방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 서현아... ”
아무래도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친다.
“ 너...너 혹시 가출한거야 ? 서현이 너...서...설마 가출한건 아니지 ? ”
그러나 승규의 물음에 서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그 모습에 놀라 승규는 그만 풀썩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을뻔 했다.
“ 너...너 대체 어쩌자구 ? ”
“ 오빠아... ”
다시 승규에게 안겨드려는 서현. 하지만 승규는 일단 그런 서현을 만류한다.
“ 서...서현아 일단...자...잠시 나가있으렴. 오빠 옷부터 좀 갈아입구. 오빠 옷부터
좀 갈아입구 이야기하자. ”
“ 오빠아... ”
“ 아니...잠깐...우선 옷부터 좀 갈아입어야 하잖아. 오빠 밖에서 일하고 방금 집에
서 들어온건데... ”
어쨌거나 서현이 있는 자리에서 옷을 갈아입을수야 없는 노릇 아닌가. 지금 서현과 무슨 이야기를 한다해도 아무래도 금방 끝날 이야기가 될 것 같지는 않구. 그래서 우선 옷부터 편한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이야기 하려는게 승규의 생각인건데, 허나 서현에겐 자신을 내쫏으려는 의도로 받아들였는지 승규를 끌어안고 좀처럼 놓아주질 않는다.
그런 서현을 가까스로 달래 잠시 밖으로 나가 있으라하고 승규는 옷을 갈아입는다. 방 한쪽에 놓여진 서현의 가방을 본다. 승규의 허리 부분까지 닿는 보통 큰 가방이 아니다. 얘가 정말 결심을 해도 단단히 했나 보구나 하는 생각에 승규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질 지경이다.
서현과 결혼하고 싶다는 승규의 마음이야 여전히 변함없지만, 정화의 허락을 받을일이 아직 첩첩산중이기만 한데 대체 어쩌자고 이러는건지. 한숨을 내쉰뒤 일단 서현을 방으로 들어오게 한다.
“ 서현아... ”
“ 오빠. ”
그윽한 눈빛으로 승규를 바라보는 서현. 그런 서현의 모습은 언제봐도 귀엽다.
“ 이 방법밖에 없었어요. ”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
승규는 힐난조로 서현에게 내뱉는다. 이렇게 무작정 가출부터 해놓고 나면 대체 나중에 불같이 화를 낼 정화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 일단 집으로 돌아가는게 어떻겠니 ? 서현이가 지금 이런다고 모든게 다 해결
되는건 아니잖니 ? ”
“ 싫어요 ! ”
단호하게 말하는 서현. 그 겁많고 어수룩한 서현에게 어떻게 이런 용기가 다 생겼는지가 놀라울 지경이다. 그녀의 말이 계속된다.
“ 집엔 안 들어가요. 엄마한테도 이미 편지 그렇게 써놓고 나왔어요. ”
“ 서현아... ”
“ 오빠. ”
“ ....... ”
“ 결혼하자고 했잖아요. 이제와 마음 달라진거에요 ? ”
“ 그런건 아냐 절대루. ”
“ 근데 왜 ? ”
“ 일단 서현이 부모님 허락부터 받아야 하는 일이잖아. 그 일이 쉽지가 않은데 지
금 무작정 이러면... ”
“ 그래서 이러는거에요. ”
서현의 눈빛엔 사뭇 어떤 결기마저 서려있다.
“ 저 어차피 이젠...방송일을 다시 시작할수 있는것도 아니고, 학교에 다시 다닐수
도 없어요. 그러니 이제 의지할수 있는 사람은 오빠뿐이에요. 오빠 외엔 제가 지
금 버티고 기댈수 있는곳이 없는데 그것마저 막히면 어떻게 해요 ? 오빠마저 없
으면... ”
“ ...... ”
“ 전 이제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단 말이에요. ”
서현은 기어이 울음을 터트린다. 승규는 서현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그녀를 달래준다. 서현의 그런 심정이야 승규가 어찌 모를까. 지금 이 순간 사실 서현의 마음을 가장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승규 한 사람밖에 없다.
방송일이야 지금 이런 상황에서 다시 시작한다는건 말도 안 되고, 학교로도 돌아갈수 없는 상황. 그런 상태에서 17세 아니 이제 18세인 소녀 주서현이 할 수 있는일이 무엇이 있을까.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정말 이젠 막다른 골목에 놓여진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서현이 유일한 버팀목으로 기대려 하고 있는 사람이 승규인 것이다.
“ 서현아... ”
서현은 여전히 울먹이고 있었다. 그런 서현의 눈물을 닦아주고.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그녀를 직접 욕실로 데리고 가 세수까지 시켜준다. 수건으로 서현의 얼굴을 닦아주는데 갸름한 그녀의 얼굴 피부의 감촉이 새삼 승규의 감성을 자극시킨다. 서현을 한번 살며시 안아본다.
“ 서현아... ”
다시 방으로 돌아와 서현에게 말을 건네는 승규. 그러면서 은근슬쩍 서현의 다리를 손으로 문질러본다. 서현도 그런 승규가 싫지 않은지 되려 미소까지 지어보인다.
“ 서현아...정 그렇다면말야... ”
승규는 침을 한번 꿀꺽 삼킨다. 뭔가 쉽게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라도 하려는것 처럼.
“ 차라리 그럼... ”
서현은 물끄러미 승규를 바라본다.
“ 진짜 한번 최후의 수단을 써 볼까. 어쨌든...결혼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
을...만들어... ”
막상 이렇게 이야기를 꺼내자니 승규도 떨리고 있다. 최후의 수단이라니. 결혼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라니. 그렇다면 과연 그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 최후의...수단이요 ? ”
“ 그래. ”
서현의 물음에 제법 힘주어 대답하는 승규. 사실 이런 이야기를 새삼스러운 것 처럼 꺼내는것 자체가 어찌보면 우습다. 이미 서현의 생일날 함께 관계를 가질때 서현이 걱정스럽게 물어보자 승규는 태연자약하게 대답하지 않았던가. 아이를 갖게되면 결혼하면 그만이라고. 그런데 지금와서 새삼 긴장할 일이 뭐가 있을까.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또 상황이 다르다면 다르다. 막상 결혼승낙을 받기위해 서현의 집을 찾아갔다가 서현의 어머니가 바로 시사랑 시절에 알고 지내던 다섯 살 연상의 이정화란 사실을 알게 되었고. 무엇보다 그저 막연히 결혼하자는 말을 했을때와 정말 이것을 구체적으로 밀어붙이게 된 상황이 되었을땐 분명히 경우가 다르다.
설사 정말 서현이 승규의 아이라도 갖게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그 뒤에 정화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예측할수 없는 일 아닌가. 게다가 정화 외에도 또 넘어야 할 큰 산 하나가 더 있다. 바로 정화의 남편이자 서현의 아버지다. 정화야 그렇다치고 그녀의 남편은 승규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 서현의 아버지가 자신에 대해 어찌 생각할지 또한 모르는 일 아닌가.
‘ 우리 서현인 아직 철이 없어서 그랬다 치더라도...최소한 그럴때 어른인 승규님
이 말렸어야 하는 일 아니에요 ? 승규님이 아직 어리고 세상모르는 서현일 잘 타
일러 집으로 돌려보냈어야 하는거 아니냐구요 ? ”
정화와 만났을때 그녀가 한 이야기도 뇌리를 스쳐간다. 너무나 기가막히고 어이없는 상황에 어찌할줄 모르던, 그리고 승규를 벌레보듯 쳐다보던 그날 정화의 눈빛이 아직도 선명하다. 정말 이래도 되는것일까. 승규라고 어찌 갈등하지 않을수 있을까.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서현을 설득해 집으로 돌려보낼 방법도 없다.
작정하고 아예 큰 가방에 옷가지와 짐을 잔뜩 싸갖고 승규의 집으로 온 서현 아닌가. 이런 서현을 그러잖아도 말주변 적은 승규가 무슨수로 설득할 수 있을까. - 물론 말솜씨 어눌한건 서현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또 오히려 이런 사람일수록 고집은 또 고집대로 세다는걸 승규도 잘 알고 있다. 무엇보다 승규 자신이 그러니까.
결국 에라 모르겠다하고 서현을 와락 안아본다. 자신의 옷을 벗기는 승규에게 서현은 아무런 저항없이 그대로 승규에게 몸을 맡기고 있다. 이미 서현은 승규를 사랑하고 있다. 승규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다는 그게 지금 서현의 마음인 것이다. 이대로 방송작가인 승규 곁에서 평생동안 그를 지켜주며 남은 인생을 살아가고 싶다는 것이 서현의 마음인 것이다.
방송일을 다시 시작할수도 없고, 학교에 다시 나가기도 힘든 처지인 서현으로썬 이렇게 김승규란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 그의 아이를 낳고 키우는것이. 자신이 남은 인생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란 생각을 한 것이다.
“ 서현아... ”
침대에 누운 서현의 긴 머리칼을 승규는 쓰다듬어본다. 그리고 서서히 서현을 애무하기 시작한다. 달아오르는 자신의 몸에 서현은 차츰 흥분되어가고 있다. 이젠 더 이상 승규앞에 부끄럽지도 않고 창피하지도 않다.
오히려 이젠 서현의 잠재되었던 욕망이 승규를 향해 거침없이 폭발하고 있다. 자신이 오히려 더 격렬하게 승규를 끌어안는다. 그렇게 한번 터진 서현의 깊숙한 욕망은 승규가 어루만지면 뜨거운 여자가 된다. 격렬한 애무가 된다. 그렇게 두 사람은 침대위에서 하염없이 서로를 어루만지고 있다.
“ 오빠... ”
관계가 끝나고 눈물맺힌 얼굴로 승규를 바라보는 서현. 이젠 새삼스러운 것도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경험을 한 소녀처럼 다시 수줍어져 있는 서현이다.
“ 귀여운것... ”
승규는 서현이 귀여워 죽겠다는듯 그녀의 코를 손으로 어루만져본다. 팬티차림의 늘씬한 18세 서현의 몸매는 승규를 다시한번 자극시킬 지경이다.
“ 넌 정말 귀여워 서현아... ”
“ 오빠... ”
“ 요 귀여운 여우...내 귀여운 여우 서현이... ”
다시 서현의 볼과 코에 입을 맞춰보는 승규. 서현의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드려보기도 한다.
“ 오빠... ”
“ 서현아... ”
서로를 다시한번 불러보는 두 사람. 승규는 서현을 또 한번 꼭 안아본다. 아니, 이대로 열 번이고 백번이고 이대로 천년이고 만년이고 서현의 곁에서 함께하고 싶은게 승규의 마음이다. 이대로 서현과 영원이 잠들어도 여한이 없을것만 같은 그게 지금 승규의 심정이다. 사춘기시절 왕따에 시달리던 소년 김승규는 그후 20년이 지나서야 나이 30대 후반이 되어서야 그제서야 인연을 만난것이다. 스무살 연하의 열여덟살 소녀 서현이 그렇게 승규의 여인이 되어 옆에 누워있는 것이다.
(7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