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그야말로 대책없이 철딱서니 없는 딸아이가 실없는 소리를 하는줄로만 여겼던 정화다. 하지만 서현의 이야기가 점점 구체적으로 계속되자 정화로썬 그저 기가막힐 따름이다. 그것도 지금까지 사귀어왔던 남자가 자신을 드라마에 데뷔시켜준 스무살 연상의 김 뭐라는 작가라니.
게다가 자신보다 스무살이나 많다는 남자를 아무런 거리낌없이 ‘ 오빠 ’라 부르는 딸의 모습은 정말 내 눈앞에 있는게 내 딸이 맞나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차라리 이게 꿈이거나 아니면 정말 워낙에 철없는 딸아이다보니 아침부터 괜히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것이었으면 하는 일말의 기대를 갖고 다시한번 침착하게 딸에게 말을 걸어보려한다.
“ 너...너...도대체... ”
“ 허락시켜줘 엄마 ! 나 진짜 오빠 사랑해. 그리고 오빠도 나 진심으로 사랑한다
고 했어. 결혼하자고 했어. ”
“ 야 ! ”
정말이지 주위에 있는 집기 하나를 딸에게 확 집어던져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도대체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이제 겨우 열 일곱 살밖에 안되는 딸아이가 그것도 자신보다 스무살이나 많은 방송작가랑 결혼을 시켜달라니. 그것도 꼴에 어디서 주워 들은건 있어서 만 18세 이후엔 법적으로 결혼이 가능하니 허락만 시켜달라는 이야기까지 덧붙이는것 아닌가. 정화로선 그야말로 지금 딸아이가 하는 소리가 기가막힐 따름이다.
“ 너 도대체 지금 제 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 지금 대체 제정신이긴 한거야 ? ”
“ 허락해줘 엄마 ! 어차피...엄마도 나에 대해 잘 알잖아. 솔직히 내가 지금 이런
상황에서 뭘 할수 있겠어 ? 학교를 다시 나갈수 있겠어 ? 아니면 방송일을 다시
시작할 수가 있어 ? 나 지금 이대론 아무도 못만나. 나 얼마나 찌질인진 엄마도
잘 알잖아. 학교고 뭐고 나 지금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상황야. 차라리...차라리
... ”
“ 학교는...전학시켜준다 했잖아 ! ”
버럭 소리를 지르는 정화다. 정 지금까지 다니던 학교 친구들 얼굴 보기 뭣해서 다니기가 그러면 전학같은 절차라도 밟아 다른 학교에서 나머지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게 해 주겠노란. 그런 대안까지 내주었던 정화다.
하지만 그때도 아무런 대꾸가 없던 서현이다. 아니, 그러고보니 그날도 실없는 소리처럼 차라리 시집가겠다는 말을 했던 서현이기도 하다. 그땐 정말 딸아이가 생각없이 내뱉은 헛소리쯤으로 여겼는데 지금 이런 상황이라면 그야말로 장난이 아닌것 아닌가.
“ 전학시켜도 소용없어. 거기 애들이라고 나 못 알아볼거 같아 ? 나 어쨌든 두
어달동안이라도 TV에서 얼굴 팔린 몸이야. 시간이 좀 지나긴 했지만, 그래도
내 얼굴 애들 안 잊어버려. 당장 아직도 그 악몽의 동영상 인터넷에서 검색하
면 그대로 나오는 판인데. ”
사건이 있은진 어느새 반년 이상이 지났고, 서현의 막말파동이야 방송에서 흔히 있는 해프닝성 사건중 하나로 사람들 기억속에 잊혀져갔지만, 그래도 서현의 동영상은 여전히 인터넷에서 떠돌고 있었다.
인터넷 바닥의 생리란게 원래 그런것 아닌가. 괴문서든 동영상이든 한번 유포되기 시작하면 5년이든 10년이든 그 생명력이 끈질긴곳이 인터넷 공간이다. 설사 서현이 이름까지 바꾸고 거기다 성형까지 해서 고등학교를 다시 나간다 해도 서현일 알아보고 그때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다시 서현의 막말파동을 입에 담을것이다. 서현으로썬 정말 두 번다시 생각하기도 싫은 그 끔찍한 악몽같은 일을.
“ 그래서...그 늙은 작가놈이 뭐래 ? 너랑 같이 살림이라도 차려 주겠대 ? 아니면
아파트라도 한 채 준대 ? ”
“ 오빠...나 진심으로 사랑한댔어. ”
서현에게서 자신의 왕따당하던 학창시절을 보는것 같다고 고백했던 승규다. 그러면서 서현의 손을 잡으면서 사랑한다는 고백을 수도없이 했던 승규. 서현에겐 적어도 그 승규의 진실됨이 마음으로 다가온지 오래지만 정화 입장에선 그 김 뭐라는 작가를 어찌 신뢰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이며 방송가가 생각보다 험한 공간이란것쯤은 정화도 대충 짐작하는 사람이다.
“ 글쎄, 그 말을 어떻게 믿냐구. 그 미친 늙은놈이 어리고 세상물정 모르는 너
꼬시기 위해선 뭔 말인들 못했고, 뭔 쇼를 못했겠어 ? ”
“ 오빠 그런 식으로 나쁜 사람으로 몰지마 ! ”
승규를 이상한 사람으로, 나쁜 사람으로 모는 엄마의 모습에 서현은 화가 나 버럭 소리를 지른다. 아무리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딸이 사귀는 남자라고 하면 최소한 믿어는 보고 만나나 보고 싶다는 생각정도는 해줘야 될 것 아닌가. 일언지하에 어린 신인 여배우를 꼬신 늙은 파렴치한으로 몰다니. 엄마가 해도 너무한것 같다는게 지금 서현의 생각이다.
“ 그리고 스무살차이...생각해보니 그렇게 많은 나이차이 아니더라. 아닌말로 한
20년 살다보면... ”
“ 이 기집애가 진짜. ”
주변에 던져버릴만한 마땅한 집기같은게 없는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나 할까. 반사적으로 옆의 아무 물곤이나 집어보려 했던 정화지만 지금 공교롭게도 테이블위엔 특별히 놓여져 있는 물품도 없고 소파까진 정화의 손이 닫기엔 거리가 약간 멀었다. 순간 당황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머쓱해져 괜시리 옷매무새만 어루만지는 정화의 모습에 그 와중에서도 그게 우스꽝스러운지 서현은 피식 웃음이 나온다.
“ 웃어 ? 이 기집애가 정말 ?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와 ? ”
“ 그러지말고 오빠 한번만 만나줘. 오빠 정말 좋은 사람이야. 그리고 알고보면
... ”
“ 오빠 ? 참 너도...아니 그래 스무살이나 많은 놈이라면서 그런 사람한테 오빠
란 호칭이 그렇게 쉽게 나오니 ? ”
학교다닐때도 워낙 숫기가 없어 친구가 거의 없다시피 했던 서현이었다. 헌데 그런 서현에게 스무살이나 많은 남자를 오빠라고 부를 너스레까지 생기다니. 신기할 지경 아닌가. 하긴 그동안 승규가 얼마나 서현의 마음을 녹여놨으면 서현이 그토록 편한 마음으로 친근감있게 승규를 오빠라고까지 부르게 되었을까 싶기도 하지만,
“ 옛날에...8남매, 9남매씩 낳던 시절엔 그렇게까지 나이차이 많은 형제나 남매
도 많았다며 ? 그러니 스무살 차이라고 해서 오빠라 못 부를것도 없는거지 뭐.
”
사실 이건 승규가 서현에게 해주었던 이야기기도 하지 않는가. 오빠라고 불러도 되느냔 서현의 말에 승규가 그렇게 말했었다. 옛날같으면 그만한 나이차이 나는 형제도 있었고, 또 서현이 오빠라고 불러주니 더 마음도 편해지고 친근감이 느껴진다는. 승규 역시 왕따에 시달리며 외로운 사춘기를 보낸 사람이었기에 자신을 오빠라 불러주는 서현이 더 고맙게 느껴졌던 것이다.
“ 옛날 ? 그래 ? 너 말한번 잘했다. 옛날같으면 바로 니나이때면 시집갔을 나이
야. 스무살차이 ? 바로 스무살차이면 너만한 딸이 있을수 있는 그런 나이차이라
고 ! 그런데 그런 남자랑 결혼하겠다니. 대체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구 ? ”
딸의 성화가 계속되자 하는수없이 그 승규라는 남자를 만나나 보기로 정화가 결심한 것은 해가 바뀌어 새해가 된 1월 초의 일이다.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남자가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하고 아둔한 자기딸을 꼬드겨낸건지, 대체 어떤 사탕발림을 했기에 아직 어린 딸아이가 스무살이나 많은 남자에게 시집을 가겠다며 저토록 난리인건지 만나나 보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만나면 두 번다시 세상물정 모르는 그리고 워낙 성격이 어수룩해 학창시절에도 늘 애들한테 따돌림당하며 살아온 그런 자기딸을 꼬시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둘 참이었다. 집으로나 일단 데려와보라는 엄마의 말에 서현은 약속한 날 승규를 데리고 왔다.
“ 아...아니 당신은 ? ”
하지만 집안으로 들어선 승규와 눈이 마주치자 정화는 또 한번 쓰러질뻔 했다. 정화가 작은 체구이긴 하지만 그래도 강단있어 보이는 몸집이긴 한데, 하지만 여하튼 이 충격적인 상황에선 기절까지는 하지 않은 그녀의 초인적인 힘이 놀랍기만 할 따름이다. 승규도 정화를 알아보고는 멍한 표정이 되었다.
“ 다...당신 김승규...그 옛날 시사랑에...그 김승규님 맞죠 ? ”
“ 이...정화님 ? ”
pc통신이 2,30대를 중심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던 90년대 중반 무렵. 그때 승규는 아직 방송작가로 데뷔하기도 전이었고 한창 방황을 하던 시기였다. 그때 활동하던 pc통신 하이텔의 문학동호회가 있었는데 그게 ‘ 시사랑 ’이었다. 그때 누나,동생 하며 알고 지내던 이정화라는 회원이 있었다. 헌데 바로 그 이정화가 알고보니 서현의 엄마였던 것이다.
“ 다...당신이 어떻게 ? 다른사람도 아니고...다...당신이 어떻게 우리앨 ? ”
“ 엄마...오빠...두 사람 아는 사이였던거야 ? ”
이 상황에 서현도 어리둥절해질수밖에 없었다. 엄마의 반응도 승규의 반응도 누가봐도 예전에 알고 있었던 그런 사이였다는 듯한 말들 아닌가. 서현이 두 사람을 번갈아가면서 보고 있는데 정화가 바로 승규에게 달려들어 물고 뜯으며 난리를 쳤다.
“ 야, 이 새끼야 ! 니가 어떻게 내 딸을...딴 사람도 아닌 니가 어떻게 ? 이 짐승
같은 새끼야 ! 니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 ”
“ 어...엄마 왜 이래 ? 엄마 오빠한테 이러지마 ! 진정해 엄마 ! 진정하고 말로
해. ”
이 기가막히고 어이없는 상황에 정화는 승규를 당장 죽여버릴듯이 달려들어 꼬집고 할퀴며 난리를 피웠고, 승규는 별다른 저항없이 그런 정화에게 당하고만 있었다. 서현이 겨우겨우 그런 엄마를 뜯어말리고. 거실 소파에 쓰러지듯 걸터앉은 정화는 서현이 컵에 따라온 물을 한모금 마시고 겨우 진정을 한다.
“ 그럼...그 김승규가...그 방송작가 김승규가 당신이었던 거에요 ? ”
“ 예, 장모님. ”
무슨 생각에서 이렇게 호칭한것일까. 어차피 서현과 결혼하기로 결심한 이상 이대로 밀어붙이자는 배짱이라도 생긴것일까. 너무나 서슴없이 나온 ‘ 장모님 ’이란 호칭에 승규 자신도 조금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정화는 더더욱 기가막힐뿐이었다.
“ 장모 ? 방금 뭐라고 했어요 ? 장모 ? ”
“ 허락해 주십시오 장모님. 저 진심으로 서현씨를 사랑합니다. ”
승규는 결국 정화앞에 무릎꿇고 애원까지 한다. 정화는 그저 기가막힐 따름이다. 여하튼 승규와는 약 10여년만의 재회다. 인터넷이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pc통신은 자연스럽게 쇠퇴했고, 그 많던 동호회들도 그 과정에서 하나둘씩 사라져갔다. 물론 하이텔의 시사랑도 다른 동호회들처럼 그렇게 소리없이 사라져갔고, 당시 시사랑에 있던 많은 회원들의 시와 작품도 모두 사라진 상태다.
그 과정에서 정화와 승규도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다. 옛날 시사랑 시절 회원들중엔 개별적으로 연락을 주고 받는 사람들도 있다는 이야긴 들었지만, 한때 회원 수만명에 달하던 시사랑 멤버들은 그렇게 동호회 쇠퇴 과정에서 하나둘씩 제갈길로 갔던것이다.
정화도 승규도 대략 시사랑 탈퇴 시기가 하이텔이 쇠퇴하던때 쯤일것이다. 게다가 정화는 그즈음이면 학부모가 되어 딸 서현이 뒷바라지하기에도 정신없을 시기니 시사랑이던 인터넷이던 관심가질 때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무렵 승규는 방송사 단막극 공모에 당선이 되어 드라마작가로 데뷔했던 것이고.
“ 설마설마 했는데...그 김승규가 당신일줄이야...동명이인이려니 하고 무심히 넘
어갔는데...세상에 어떻게 이런일이... ”
어쨌든 승규는 어느덧 방송작가 경력이 10년에 달하는 스타급 작가다. 그동안 사극과 일일극중 히트작도 몇편 있었고. 헌데 어떻게 정화가 그동안 김승규에 대해 까맣게 모르고 있었을까. 정화가 국문과 출신이긴 했지만, 원래 작가지망생이거나 이런건 아니었다.
시사랑에 가입했던것도 그저 젊은 시절 소일거리로 활동했던것이지 문학이라던가 그런데 큰 관심이 있었던건 아니었다. 국문과 전공을 활용한 전력이 있다면 그저 결혼후 생활비나 좀 벌어볼 요량으로 학원에서 국어강사를 좀 한적이 있는게 전부일 뿐이다.
원래 TV 드라마 같은데도 별 흥미가 없었고, 그러니 설사 김승규가 김수현이나 신봉승 같은 대 원로작가가 되어있다 하더라도 그저 그런사람이 있구나 하는 정도의 관심만 가졌을것이다. 하물며 비록 김승규가 지금 한창 뜨기 시작하는 스타작가라 하더라도 드라마를 잘 안보는 정화로선 그걸 알 수는 없을것이다. 혹여 TV 자막 같은데 ‘ 극본 김승규 ’란 이름이 보여도 동명이인이려니 하고 넘어갔던 것이다.
승규와 정화는 오프라인에선 딱 세 번 만났다. 두 사람이 시사랑에서 활동했던 시기는 90년대 중반부터 시사랑 쇠퇴기까지 대략 2-3년 정도의 엇비슷한 시기긴 하지만, 그렇게 친하게 지낸 사이는 아니다. 그저 지인(知人)정도로 표현할 수 있는 사이였던 셈이다.
첫 번째는 96년경 있었던 시사랑의 정기모임때 일이었고, 두 번째는 연말경 시사랑 회원들과 영화번개를 가진적이 있었는데, 그때 함께 영화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영화관람을 마치고 돌아올때 정화와 승규의 집이 같은 방향이라 같은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간 적이 있었다. 승규는 그때나 지금이나 강동구에 살고 있었고 정화는 2호선 시청역에서 승규가 버스로 갈아타기 위해 내려야하는 성내역보다 두정거장 앞인 구의동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세 번째 만남은 이듬해 1월 무렵 정화가 느닷없이 시사랑 채팅실에서 번개를 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평일 오전이라 채팅실에 들어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반(半) 백수생활을 하고 있었던 승규가 마침 대화방에 들어와 정화의 번개낚시에 걸려든 것이었다. 함께 인천 앞바다에나 가보자는 정화의 제안에 승규가 응해 두 사람은 전철을 타고 인천으로 향했다.
“ 승규님... ”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것인지 잔뜩이나 침울한 분위기였던 그날의 정화. 송도유원지 인근 백사장에서 서해바다를 바라보며 정화가 슬픈 표정으로 승규에게 말을 건넸다.
“ 승규님은 결혼생활과 종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 ”
“ 종교...요 ? ”
“ 네. ”
“ 글쎄요... ”
승규도 고등학교 시절에 잠깐 교회에 다닌적이 있다. 하지만 그건 왕따당하던 학창시절 잠시 마음의 위안이나 삼고자 다녔던 것이고, 지금은 다시 교회나 신앙생활 같은데에선 관심이 멀어진 무신론자나 다름없는 상태다. 헌데 그런 승규에게 대뜸 종교에 대해 묻다니. 승규로선 뭐라 대답할말이 마땅치 않아 정화가 물어본말만 괜시리 입으로 웅얼거려보곤 쭈볏한 자세로 서 있었다.
“ 그 사람은... ”
“ ...... ”
“ 참 독실한 사람이에요. ”
그 사람이란 아무래도 정화의 남편을 말하는것 같다. 얼핏 승규의 기억에도 정화가 유부녀란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자유게시판에 정화가 이따금 글을 올린적이 몇 번 있었는데 거기에 대충 남편이 어쩌구 딸이 어쩌구 하는 내용을 본 적이 있으니까. 헌데 그런 그녀의 결혼 생활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다는 것일까.
“ 남편이 처음 저랑 교제할 때 그러더라구요. ”
“ ...... ”
“ 제가 자기를 사랑하기전에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면 좋겠다구
요. ”
“ 하나...님을요 ? ”
정화의 가정환경에 대해서야 승규가 자세히 알 수는 없는것이지만, 그녀가 이런식으로 말하는걸로 봐선 아무튼 정화의 남편이 꽤 독실한 크리스찬인것 같다는 느낌은 든다. 그녀의 말이 이어진다.
“ 전 그때 아무것도 모른채...철모르고 지금의 남편한테 빠져들었던...그야말로 철
부지 대학생이었으니까요. 그 이야긴 아시죠 ? 우리 캠퍼스 커플이고, 대학 졸업
하자마자 바로 결혼했어요. 그리고 얼마안가 딸을 낳았구... ”
뭔가 많은 회한이 밀려오는듯 정화는 한숨을 내쉬었다. 허연 입김이 허공으로 흩어지는 가운데 정화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 오래전에...제가 사춘기때 일이었어요. 제게 삼촌뻘 되는 친척 한분이 그런 말
씀을 종종 하시더라구요. 너무 종교에 깊이 빠진 집엔 시집가지 말라구...나중엔
골치아프고 후회하게 된다구... ”
“ ...... ”
“ 원래 술주정뱅이에 백수건달로 사시는 삼촌이셨고...추석때 술에 많이 취하시
면 저나 사촌언니,동생들 붙들어놓고 늘 횡설수설 늘어놓는 말씀이셨기 때문
에 그땐...저 삼촌 또 술취하셔 저러시는구나 그렇게 생각했죠.
그 삼촌이 그러시면 저희 어머니나 큰아버지 또는 다른 삼촌들이 만류하시며
그분을 밖으로 내모셨고...뭐 저희도 어릴때...괜히 어린 저희들 붙잡고 술냄새
풍기며 이상한 말씀 하시는 그 삼촌 당연히 싫었죠. ”
결혼생활과 종교에 대해 어찌 생각하느냐는 물음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그녀의 어린시절 이야기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아무래도 뭔가 가슴속 깊이 단단히 박힌 응어리가 있는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정화와 그녀의 남편은 대학 졸업후 바로 결혼한 캠퍼스 커플이라 했던가. 그렇다면 그녀와 인천앞바다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 시점에서 계산을 해도 얼추 5,6년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 하지만...이제와 생각하면 그 삼촌 하신 말씀이 이해가 갈 것 같더라구요. 술은
생전 입에 대지도 않는 남편, 주일성수는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지켜야 하는것을
원칙으로 알고있는 남편. 그런 남편과 신혼땐 티격태격 다투기도 했어요. 뭐 여
하튼 다른 남자들처럼 또는 어릴때 뵌 그 삼촌처럼 술먹고 주정하거나 밤늦게 들
어오는 그런일은 없으니 그건 좋았지만... ”
“ ...... ”
“ 살면 살수록 그런걸 느낀일이 많아요. 이 남자 생각보다 굉장히 고리타분하고
답답한 남자로구나 하는 그런걸요. ”
“ 많이 힘드신가봐요 정화님 ? ”
정화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만 있던 승규가 조금 썰렁하게 그렇게 물었다. 과연 어눌한 승규다운 반응이다. 많이 힘드신가봐요라니. 많이 힘드니까 그런 넋두리를 승규에게라도 늘어놓는 것이겠지. 헌데 이야기 다 듣고나서 무슨 뒷북마냥 이렇게 묻다니. 승규도 참 대책없는 남자임에는 틀림없다.
“ 서현아... ”
그때, 정화의 여섯살난 딸도 함께 있었다. 그러고보니 정화의 딸과도 아주 초면은 아니다. 작년에 있었던 시사랑 정모때도 그녀는 딸과 함께 왔다. 하지만 그때야 수십명에 달하는 회원이 행사장에 있던 그런 상황이니 얼핏 인사만 나누었을뿐. 그러니 그때 정화의 딸 서현에 대한 기억은 있을 리가 없다. 여하튼 두 사람과 조금 멀찍이 떨어져서 혼자 놀고있던 서현은 엄마의 부름에 쪼르르 달려왔다.
“ 서현이에요...주서현... ”
“ 아, 네에... ”
딸을 안아올려 승규에게 보이며 정화가 했던 말이다. 여섯 살난 어린 서현은 엄마와 함께 있는 영문도 모르는 아저씨에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그러니 실상은 그게 서현과의 첫 만남인데. 헌데 그로부터 십년뒤에 만난 서현이 그때 그 서현이란걸 몰랐다니.
하긴 십년이 지난뒤의 일이다. 십년이 지난뒤에 이미 17세 소녀가 되어있는 이에게서 어찌 10년전 여섯 살 어린아이의 모습을 떠올릴수 있을것이며, 서현이야 여섯 살때 일이니 그때 승규의 일 자체가 기억이 날 리가 만무하다.
시사랑 오프라인 모임에 엄마와 함께 갔을때야, 그야말로 엄마따라 영문도 모르는 장소에 갔던것에 불과했을것이고. 인천앞바다에서의 만남이야 서현으로선 어릴때 일이니 기억 자체에 있을 리가 없다. 그때 엄마가 누굴 만났든 무슨 이야기를 했든 여섯 살짜리 꼬마애가 관심자체를 두었을 리가 없고, 사실 한달도 채 지나지 않아 잊어버렸을 일이다.
그러니 당연히 10년 세월이 지난뒤 드라마 촬영장에서 만난 승규와 서현인 서로를 못알아볼 수밖에. 승규의 입장에서도 10년전 그때 그 꼬마아이 이름이 서현이었던것 자체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얼핏 정화의 딸 이름을 듣긴 했지만, 이정화란 여인 자체가 시사랑을 탈퇴한뒤 자연스럽게 잊혀졌던 존재인데 하물며 그녀의 딸 이름까지 10년이 지나도록 기억하고 있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 이 아인... ”
다만 그때 정화가 결혼생활의 힘든 부분을 잠시 언급하며 딸에 대해 이런 이야기도 덧붙인 일은 있다.
“ 저처럼 자유분방하고 활동적인 그런 아이로 키우고 싶어요. 남편처럼 답답하
고 고리타분한 그런 아이로 키우지않고... ”
물론 그런 일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승규의 기억에서도 정화의 기억에서도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10년이 지난뒤 승규와 정화는 그렇게 어처구니 없는 재회를 하게된 셈이다. 승규는 정화의 딸 서현의 연인이 되어 그리고 정화는 승규가 이미 미칠정도로 사랑하고 있는 소녀 서현의 어머니 입장이 되어. 물론 그러면서 까맣게 잊어버렸던 10년전 시사랑에서의 기억까지 떠올려지게 만들며.
“ 그럼...그때 그 꼬마아이가 바로... ”
하면서 승규는 서현을 다시한번 바라보았다. 설마 그때 그 여섯 살짜리 아이가 바로 이 서현일줄이야. 보조연기자 아르바이트를 하던 그녀를 교통사고 부상으로 빠지게 된 아역배우대신 대타로 즉석 오디션을 통해 데뷔시키고, 그녀가 막말파동으로 방송출연 정지를 당하자 서현에게 직접 연락해 그녀를 위로해주고. 그러다 어느덧 사랑하는 사이로까지 발전해 서현에게 결혼하자는 고백을 하게 되기까지도 까맣게 몰랐다.
십년전 그 일 자체가 이미 승규의 기억속에서 잊혀진 사건이었고, 무엇보다 십년전의 여섯 살 꼬마아이를 연상케하기엔 서현은 이미 훌쩍 큰 그것도 성인으로 봐도 무방한 몸매와 매력을 지닌 17세 소녀로 성장해 있었으니까.
어쨌든 이날은 둘 다 충격을 받은 상황에서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했다. 정화는 승규에게 일단 돌아가라고 했고, 승규도 하는수없이 서현의 집에서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며칠후 정화가 개인적으로 연락해 만나자고 했다. 약속장소에서 만나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눈다.
“ 도대체가... ”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듯 승규와 마주앉자마자 정화는 한숨만 계속 내쉬었다. 그리고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 서현이가 이정화님 딸일것이라곤 정말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
“ 그때도 우리 딸애 봤었잖아요. 근데도 지금까지 전혀 눈치를 못했단 말이에요 ?
우리 서현일 ? ”
“ 그때일 자체가...다 잊어버린 일이었던데다가...사실 정화님 이름도 기억에 가물
가물해져 있던 상태였습니다. 그러다 서현이 집에서 정화님과 마주치는 순간 기
억이 났고요. 그때 그 꼬마아이가 바로 서현일거란 생각은 정말 꿈에도 못 했습
니다. ”
“ 하긴...저도...그 드라마 작가 김승규가...그때 시사랑의 김승규님일거란 생각은
꿈에도 생각 못했으니까요. ”
그러니 피차 마찬가지 아닌가. 서현이가 바로 그 이정화의 딸 서현일거란 생각을 짐작조차 못한 승규나, 서현일 연기자로 데뷔시켜주었다는 그 방송작가 김승규가 시사랑때의 그 김승규일거라곤 생각조차 못한 정화나.
“ 사실 저 드라마 잘 안 보는 사람이에요. 그러니 승규님이든 누구든 당연히 잘
알지 못할수밖에요. 하지만 그날 일 있고나서 한번 인터넷에서 승규님 관련 기
사 몇 개 찾아봤어요. 정말...많이 크셨네요 ? ”
많이 컸다는 말이 듣는이에 따라선 비아냥조로 들릴수도 있겠지만, 정화로선 나름대로 대견스럽다는 의미를 섞어서 한 말이다. 이 상황에서 많이 컸다 운운하는 표현이야 누가 들어도 비아냥처럼 들리기 십상이겠지만. 시사랑 시절 승규를 기억하는 정화로썬 여하튼 격세지감과 함께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정도로 몰라보게 달라져있는 승규가 여하튼 대견하다는 생각도 조금은 들었던 것이다.
“ 시사랑...일기장에 승규님이 어린시절 이야기 수기로 올리던거 관심있게 봤었었
죠. ”
그 시절 승규에게 시사랑은 일종의 해방공간이었던 것이다. 극심한 왕따에 시달리던 사춘기시절, 그리고 방황하던 20대 초,중반의 이야기. 그걸 시사랑에 가입한지 얼마되지 않아 수기 형식으로 일기장 게시판에 올린적이 있었다. 시사랑 회원들중 평소 승규에게 관심이 있던 사람들이 그 글을 주목하며 읽어보았고 정화도 그중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 그땐 참 많이 힘들어하시더니만...여하튼 이렇게 작가로 성공한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
하지만 지금 마냥 그런 감회에 젖어있을 상황은 아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딸 서현과의 결혼을 허락시켜 달라고 나타난 딸보다는 스무살 연상 그리고 자신보담은 다섯 살 연하인 방송작가 김승규 아닌가.
(6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