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현은 승규를 와락 끌어안은채 마냥 서럽게 울고 있었다. 비에 흠뻑 젖은 서현의 옷과 몸은 말이 아니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러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마냥 이러고만 있어서 될 일이 아닌것 같기에 일단 서현을 집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 몸이 말이 아니구나. 아니, 그리고 이 상태로 마냥 집에서 여기까지 달려온거
야 ? ”
“ 버스타고...왔어요... ”
하긴 서현의 집에서 승규가 사는곳까지의 거리를 생각해볼때 그 먼곳에서 여기까지 걷거나 뛰어 왔을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어찌되었거나 우산도 쓰지 않고 그 먼곳에서 무작정 여기까지 달려왔다니 그것만으로도 놀랄일이 아닌가. 승규는 우선 급한대로 수건을 하나 가져왔다. 그리고 비에 흠뻑젖은 서현의 머리카락과 옷을 닦아준다. 서현이 입고있는 옷은 이미 옷이 아니라 물범벅 그 자체였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승규는 욕실로 가서 불을 켠다.
“ 이럴게 아니라...우선 좀 씻어야겠다. 보일러를 켜줄테니까 어서 욕실로 들어
가 씻으렴. 내가 곧 갈아입을 옷을 꺼내줄게. ”
승규의 말에 서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욕실로 들어간다. 물론 고맙다는 인사말도 잊지 않고. 목욕물을 데우기 위해 승규는 보일러 스위치를 켜고 서현은 욕실 안에서 벗은 옷을 밖으로 내어놓는다. 승규는 서현의 젖은 옷은 빨래통에 집어넣고 걸레를 가져와 서현으로 인해 마룻바닥에 흘러내린 빗물도 닦는다. 그리고 서현이 갈아입을만한 추리닝을 한 벌 꺼내 욕실 앞에 가져다 놓는다.
얼마정도 시간이 지난후 서현이 목욕을 마치고 탕안에서 나온다. 상큼한 샴푸와 비누내음이 풍겨져 나온다. 그제서야 아까는 말이 아니었던 서현의 몰골이 제대로 돌아온 것이다. 승규는 새삼 서현의 매력적인 몸매를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보기까지 한다. 요즘 학생들이야 예전에 비해 대체로 평균 체구가 많이 커지긴 했지만 서현도 열 일곱 살이라곤 믿겨지지 않을 성숙한 몸매를 지니고 있다.
“ 서현아... ”
“ 죄송해요 선생님. ”
“ 아니 뭐...죄송해 할 것 까진 없고...헌데 대체 이 늦은 밤시간에 무슨 일이야 ?
부모님이 걱정하시면 어쩌려구. ”
그 말에 서현은 대꾸가 없다. 그러다 갑자기 무슨 북받치는 것이 있는지 ‘ 흑~! ’ 하고 흐느낌 소리를 낸다.
“ 서현아... ”
승규는 일단 흐느끼는 서현을 다독인다. 그리고 말을 건넨다.
“ 여기서 이럴게 아니라 방에 들어가 이야기 하는게 좋을 것 같구나. 들어가자
... ”
승규가 혼자 사는 25평 집은 두 개의 방과 욕실,거실 그리고 주방등이 갖추어져 있다. 두 개의 방중 하나는 승규가 침실로 쓰고 또 하나는 서재이자 승규가 원고작업을 할때 쓰는 컴퓨터가 놓여져 있는 방이다. 하지만 승규는 글을 쓰다가 그대로 잠이 들때가 있기 때문에 그곳에도 작은 간이 침대를 하나 가져다 놓았다. 허나 승규는 일단 서현을 자신의 침실로 안내한다.
수건을 하나 다시 가져와 아직 채 마르지 않은 서현의 머리를 다시 한번 닦아준다. 그리고 드라이로 완전히 서현의 머리카락을 말려주기까지 하고. 승규의 행동은 사뭇 세심하고 자상하기까지 하다.
“ 서현아... ”
“ ...죄송해요 선생님... ”
“ 대체 무슨일이야...대체... ”
“ 아버지가...아버지가... ”
바로 서현의 부모님이 식당을 차리기 위해 사채까지 끌어들인 그 직후의 일이다. 지금 당장 사채 빚을 갚아야 한다던가 그런 정도의 위기까지 몰린 것은 아니지만, 서현은 어린 마음에 무서웠나보다. 그래서 무작정 승규를 찾아와 무섭다며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며 애원한 것이다.
“ 서현아... ”
서현으로부터 그녀의 사정을 들은 승규는 착잡한 심정으로 서현을 바라본다. 어찌되었든 이 모든게 다 자신때문인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 미안한 마음도 더욱 커져간다. 사실 굳이 따지자면 서현의 부모님이 식당을 차리기로 한 것은 승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지만. 여하튼 서현의 힘든 상황의 발단은 결국 승규가 그녀를 드라마로 데뷔시킨데서 시작된 것 이니까.
“ 일단 진정하고...사채를 끌어다 쓴다는게 사실 진짜 위험한 일이긴 하지. 하지
만 지금 당장 서현이네 집안이 사채빚 때문에 어떻게 된 것도 아닌데. 지금부터
너무 지레짐작하고 겁먹을것 까진 없어. ”
“ 정말...아무일 없을까요 ? ”
“ 글쎄...그건 상황을 좀 더 지켜봐야 알 수 있는 문제겠지만, 일단 서현이네가 차
리기로 한 식당이 잘 되어서. 사채빚으로 인한 문제가 생기지 않고 말끔히 잘 해
결되기를 바라는 수 밖에 없지. ”
서현의 행동이 좀 경솔하다면 경솔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사채를 끌어다 썼다고는 하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인해 서현이네가 어떤 문제가 생긴것도 아닌데. 어린 마음에 그냥 무작정 무섭고 겁이나서, 행여 그런 문제로 인해 자신이 어떻게 되는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무작정 승규의 집으로 달려온 것 이니까. 승규도 학창시절부터 워낙 소심한 성격으로 유명했지만, 서현도 그 못지 않은 아이였다.
“ 서현아 일단... ”
“ ...... ”
“ 오늘은 일단 여기서 자렴. 마음 편히먹고...부모님껜 내가 전화드릴테니까...
그리고 내일 날이 밝거든 차로 선생님이 서현이 집에까지 데려다줄게. ”
“ 정말 그래도 돼요 선생님 ? ”
“ 그럼, 선생님이 어려운 일이 있거든 아무런 염려 말고 바로 선생님에게 찾아
오라고 했잖아. 잘왔어 서현아. 그래도 방황하지 않고 바로 선생님한테 찾아와
준 그 자체로도 난 고맙구나. ”
“ 죄송해요 선생님. ”
승규는 그런 서현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준다. 아직 열 일곱 살이지만 서현은 마냥 어린 여고생처럼 보이지만은 않았다. 승규는 서현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마음 편히 갖고 여기서 자라고 하곤 서현일 침대에 손수 눕혀주기까지 한다. 그리고 승규는 자신의 서재에서 잠을 청한다.
서현은 그렇게 그날 승규의 집에서 하룻밤을 잤다. 그리고 다음날. 승규는 서현에게 손수 아침을 차려주고 그리고 자신의 차로 서현을 데려다주려 했다. 어제 비에젖은 서현의 옷도 세탁기로 빨아 다 말랐고. 그 옷을 챙겨갖고 서현을 집으로 돌려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거실에서 물끄러미 그런 승규를 바라보던 서현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 저어... ”
“ 왜 서현아 ? ”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것인지. 하지만 서현은 고개를 숙인채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 하고 있었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자고 승규는 재촉하는데. 서현은 좀 엉뚱하게도 어렵게 입에서 한마디를 꺼낸다.
“ 오...빠... ”
“ 뭐 ? ”
갑작스럽게 서현의 입에서 나온 ‘ 오빠 ’라는 말. 그 말이 순간 승규는 당황스럽기돋 하고 그러면서도 싫지는 않았다. 서현은 순간 자신이 무슨 말 실수라도 한것 같아 손으로 바로 입을 막는다.
“ 죄...죄송해요...근데 실은... ”
“ ??? ”
“ 오빠라고...부르고 싶었어요. 그래도 돼요 ? ”
“ 서...서현아... ”
승규와 서현의 나이차이는 무려 스무살. 그야말로 옛날같으면 승규에게 서현이 만한 딸이 있을수도 있는 그런 나이차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론 8남매,9남매를 낳던 예전엔 그만한 나이차이가 나는 형제나 남매도 흔히 있었다. 하지만 승규는 지금 서현이 자신에게 오빠라고 부르는것이 적절한지 그 여부보담은 오빠라는 단어 자체로 인해 느껴지는 묘한 감정이 가슴속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일이 있은게 벌써 두달전의 일이다. 그리고 지금은 10월 말. 어쨌든 서현이 승규에게 오빠라고 불러도 되냐는 말을 했을때, 승규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찌보면 참 철없고 당돌한 한 여자아이의 말처럼 여겨질수도 있을텐데.
하지만 워낙 어릴때부터 외롭게 자란 승규라서일까. 자신에게 오빠라고 부르고 싶다는 서현의 말이 싫게 들리지 않았다. 아니, 오빠라는 말에 서현에 대한 친근감이 한층 더 생기는것 같아서 승규로선 오히려 서현에게 고맙다는 말이라도 하고 싶은 그런 심정이었다.
사실 서현 역시 당돌하거나 그런 성격은 아니지 않는가. 오히려 서현도 승규처럼 내성적이고 말투도 어눌한 그랬던 아이. 그래서 방송 오락프로에 나와선 꿀리지 않으려고 또는 튀어보려고 심한 농담을 함부로 하다가 결국 막말 파문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하지만 오빠라고 부르고 싶다는 말을 승규에게 했을때 서현의 속 마음은 떨리고 있었다. 사실상 서현도 언제부터인가 승규에게 끌리고 있었음을 인정한 상황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두 사람 다 워낙 숫기가 없는 성격이다 보니 바로 두 사람 사이의 호칭이 오빠,동생으로 바뀌진 않았다. 서현은 어렵게 오빠라는 호칭을 승규에게 붙여가기 시작했고, 승규는 그런 서현에게 별다른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으며 서현의 호칭을 그대로 수용해가고 있었다. 그렇게 알게 모르게 서현은 승규에게 말까지 놓게 되고, 정말 승규를 마음 편한 오빠처럼 대하고 싶은 그런 생각까지 들었던 것이다.
승규는 원래 서현의 생일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생일을 맞아 서현에게 전화를 해서 오후쯤 자신의 집에 와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다. 그리고 케익을 자신의 서재 한쪽에 숨겨다 놓고 잘 찾아보라고까지 했던 것이다. 그리고 저녁 늦게 일이 끝나고 귀가한 승규는 서현을 위한 작은 생일파티를 치루어 주었던 것이다.
“ 오빠... ”
승규옆에 누워있는 서현이 나긋한 목소리로 그를 부른다.
“ 왜, 서현아 ? ”
“ 오빠 근데... ”
“ 응. ”
“ 아까전에...나랑 결혼하고 싶다고 했잖아. ”
서현으로선 승규가 첫 남자다. 사실상 오늘밤은 서현으로선 17세가 되는 생일날 관계를 치룬 실로 영원히 잊을수 없는 역사적인 날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한켠으론 걱정스러운 듯 이러다 만약 덜컥 임신이라도 하면 어쩌냐고 물었다. 그러나 승규는 뭘 그런걸 다 걱정하느냐는듯 태연자약하게 그럼 결혼하면 되는것 아니냐 말했던 것이다.
“ 그 말 진짜 진심인거야 ? ”
방송이나 신문잡지 인터뷰에서 결혼할 생각이 없다는 말을 여러차례 한 일이 있는 승규. 그런 승규란걸 알기에 서현은 여전히 승규의 말이 신뢰가 안 가는 모양이다. 그런 서현을 안심 시키기 위해 승규는 이렇게 말했다.
“ 서현이 넌...나로 하여금 날 닮은 아이를 낳아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
첫 번째 여자야. ”
사실 이쯤 되면 승규의 태도도 문제라 할 수 있다. 어쨌든 서현은 아직 열 일곱 살 한참 공부해야할 고등학생 나이. - 물론 지금 서현은 학교를 중퇴한 상태지만 - 그렇다면 스무살이나 많은 승규가 서현을 잘 타일러서라도 잘 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인도해 주어야 할 것 아닌가. 그러나 서른 일곱이나 되어 찾아온 인연앞에 승규는 이미 자제력을 잃고 있는 것일까.
오히려 서현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거절하고 타일러야할 승규이건만 절제심을 잃은채 오히려 자신이 좀 더 성큼성큼 저돌적으로 서현에게 다가가고 있다. 정말 이런 모습을 보면 저게 학창시절 그토록 왕따당하던 승규, 20대가 되어서도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직장에서 짤리기 일수였던 그 승규가 맞는지 의심이 다 갈 지경이다.
“ 서현아... ”
“ 응, 오빠... ”
“ 서현이한테 이미 몇 번 한 이야기기도 하지만... ”
“ ...... ”
“ 사실 오빤 만약 방송작가가 되지 않았더라면 과연 내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
는일이 무엇이었을까 하고 고민해본적이 많아. ”
서현은 애틋한 눈빛으로 승규를 바라본다. 처음 서현이 막말파문으로 방송활동 정지를 당하고 힘들어하고 있을때 자신에게 연락해 왔던 승규. 그때 승규가 자신을 보며 마치 20년전 그의 모습을 보는것 같다는 말을 했을때는 사실 선뜻 그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승규와의 교제라면 교제라고 할 수 있는 시간이 지속된지도 다섯달여. 힘들어 하고 있을때 자신을 위로해 준 승규가 고맙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론 그런 승규를 알아가면서 이 남자도 보기보다 외로움을 많이 탔던 그런 남자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승규가 자신의 내면을 고백할때면 승규에 대한 서현의 감정도 갈수록 애틋해져만 간다.
“ 오빠... ”
다시 승규를 불러보는 서현.
“ 근데, 정말 우리 결혼할수 있는거야 ? ”
“ 법적으로야... ”
“ ...... ”
“ 만 18세 이상이면 결혼할수 있으니까. 단 부모님 허락이 떨어진 뒤에. 근데 사
실 그게 좀 묘하게 되었다. ”
“ 묘하게 되다니 왜 ? ”
“ 실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결혼 가능 연령이 남성 만 18세, 여성 만 16세였어.
그런데 한 2-3년전쯤부터 그 법이 개정되었더라고. 그래서 여성도 만 18세 이
상으로 바뀐건데... ”
“ ??? ”
“ 그러니...얼마전 같기만 했었어도 지금 서현이 나이는 충분히 결혼이 가능한 나
이였거든 헌데. ”
그런데 생각해보니 좀 우습다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지금 서른 일곱 살의 승규는 스무살이나 어린 서현과 구체적으로 결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상황 아닌가. 정말 이대로 서현과 결혼이라도 할 결심을 굳히기라도 했다는 이야긴가 뭔가. 그것도 승규 자신이 한 말처럼 지금은 법적으로 서현이 결혼이 가능하려면 1-2년 정도를 더 기다려야 하는데. 그 생각을 해보니 자신이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어 승규는 살짝 미소를 지어보인다.
“ 어쨌든 지금은...그러니 참 공교롭게도 되었구나. 한 1-2년은 더 있다가 서현이
랑 결혼해야 되겠네 ? ”
빙긋이 웃으며 승규는 서현의 손을 한번 잡아본다.
승규의 품에 안겨 서현은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이 순간만은 세상 모든 근심 걱정을 모두 잊어버리고 한없는 평온함과 안온함에 잠기는 그런 시간이었다. 그 감정은 승규도 마찬가지였다. 서현만 바라보면 마냥 마음이 편안해졌다.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오면서 과연 이러한 평온함을 느껴본 시간이 언제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다 들 지경이었다.
승규와 서현. 두 사람의 사이는 언제부터인가 이미 그런 관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둘이 함께 있으면 마냥 좋기만 하고, 행복하기만 한 느낌. 이 세상의 모든 걱정,근심,시름들이 모두 다 사라지고 한없는 평안함과 안온함에 젖어드는 그런 느낌. 명색이 작가인 승규이건만 그 평온한 느낌을 과연 어찌 표현하는것이 적절할지, 또 어떤 느낌이라 설명하는것이 타인들에게 논리적인 이해가 가능하게 만들 수 있을것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래, 이런걸 흔히 말하는 사랑이란 감정이라 할 수 있는것일까. 지금까지 승규가 이런 느낌을 가져본 적이 거의 없었다는것을 생각해본다면 이게 진짜 사랑이란 감정이라 말할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젊었을때 한때 부질없는 욕망을 채우고자 혹은 단순한 호기심에 유곽 같은데서 여자와 그런 관계를 가져보았던가 그런 일등을 제외한다면. 승규에게 이런 감정은 분명 다른 성격의 것이었다. 그저 단순히 애욕을 채우기 위해 느끼는 그런것과는 분명 달랐다. 조금전 서현을 품에 안고 사랑을 나누던 그 시간의 감정도 분명 그러했다.
애욕을 위한 분출은 그저 저돌적인 행위에 불과했다면 서현을 품에 안은 그 순간에는 이 여인을 자신이 지켜주고 싶다는, 아니 반드시 그렇게 지켜주고 보호하고 싶은 그런 존재이기에 그래서 안는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다시 말하면 애욕을 채우는 단순한 감정은 하체의 흥분만을 자극시켰다면 서현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그것은 가슴으로부터 느껴지는 그런 것이었다.
승규의 곁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서현의 표정. 그녀 역시 마냥 행복해 보이는 그런 모습이었다. 승규는 서현의 잠든 모습이 너무나 귀엽고 예뻐서 그녀의 이마와 볼에 다시한번 살짝 입맞추어보았다. 서현이 행여 깰세라 조심스레 그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져 보기도 했다. 여하튼 서현은 승규에게 너무나 사랑스러운 존재였다.
다음날. 날이 밝고나서 승규가 서현보다 먼저 잠에서 깨었다. 승규가 씻고 나올 무렵쯤에야 서현도 깼다. 잠에서 막 깬 목소리로 서현이 승규를 불라본다.
“ 오빠... ”
“ 어...지금 일어났니 ? ”
방으로 들어오자 침대에 걸터앉아있는 서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그런 서현에게 그렇게 말을 건넸다. 서현은 물끄러미 승규를 바라보고 승규는 그런 서현을 다시한번 가만히 안아본다.
알고보면 실상 힘들때 만나 서로의 마음을 나누다가 그것이 사랑의 감정으로 바뀌어 커플로 연결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아무래도 서로에 대해 속깊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아지다보면, 그만큼 상대방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는법. 그러다 보면 이 사람이 나에게 적합하거나 어울리는 사람인지 아닌지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판단을 하게 된다. 여하튼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지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감정으로 쉬이 발전하게 되는것 같다.
승규와 서현도 바로 그런 케이스다. 서현은 막 연예계에 데뷔 뜨기 시작하다가 막말 파문으로 방송출연 정지를 당했고, 너무 어린나이에 반짝 스타가 되었다 추락한 서현이 자신을 어찌해야할지 몰라 주체할수 없을때 그때 서현의 곁에 있어준 존재가 바로 승규였던 것이다.
한편 승규에게 있어 서현의 존재는 서현에게 있어서의 승규의 존재감과는 조금 의미와 성격이 다른 것이기도 했다. 승규에게 있어 서현은 왕따당하던 학창시절 그리고 대인관계에 잘 적응하지 못하던 20대 초,중반 시절 그 시절을 돌아볼수 있는 하나의 거울 같은 존재였다.
그런 서현이었기에 마치 자신의 20년전 모습을 보는것 같았기에 그만큼 서현이 잘 이해되고 안타까운 심정이 한결 더했던 것이라고나 할까. 승규가 그런 일들로 힘들어 하던 시절엔 곁에 아무도 없었다.
그의 마음을 이해해 줄 사람도, 그의 친구가 되어줄 대화상대도 없었다. 그랬기에 더 견디기 힘들었던 고통의 시간들. 그걸 알기에 승규는 더더욱 서현의 곁에서 그녀를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 서현아 ”
잠시 세상 모든 것을 잊은든 다시 서로를 안은채 그렇게 멍하니 있던 두 사람. 그러다 승규가 서현을 불러본다.
“ 이제 그만...씻고 집에 가야지. 오빠가 집에 데려다줄게. ”
그 말에 서현의 표정이 잠시 시무룩해진다. 집에 가기가 싫은 것일까. 아니면 이대로 승규와의 시간을 더 보내고 싶은 것일까. 하지만 그럴수야 없는 일이고 서현은 부모님이 계신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것이 현재 그녀의 현실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순간 서현은 그게 싫다는 그리고 이대로 승규와 헤어지는게 서운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마치 어릴때 친구집에서 실컷 어울리다가 집에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을때 느끼는 그런 감정과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 물론 서현이야 승규처럼 학창시절 친구가 거의 없었으니 그런 감정을 느낄 기회도 없었겠지만
여하튼 서현에겐 집에 돌아가야 하는것이 그녀의 현실이고, 욕실에서 목욕을 하고, 승규가 차려준 간단한 아침식사를 한 뒤, 승규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지금까지 서현이 승규의 집에 놀러온 적이 몇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집에 돌아갈땐 승규가 직접 자신의 차에 태워 돌려보내 주었다.
하지만 승규의 집에서 하룻밤을 잔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첫 번째는 바로 두달전 비오는 여름날 밤, 무섭다며 무작정 승규의 집에 찾아온 일이고. 그땐 승규의 집 침실에서 그냥 잠만 자고 다음날 승규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함께 성관계를 갖고 다음날 아침 집으로 돌아가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이다.
“ 오빠... ”
집 근처까지 다다랐을때 서현이 승규를 애틋한 목소리로 다시한번 불러본다.
“ 다 왔어. 이제 그만 집에 들어가야지. ”
하지만 이대로 내리기가 서운하기라도 한 것일까. 잠시 망설이는듯 하던 서현은 승규에게 다시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 근데...어제 한 말... ”
“ 어제 한 말 뭐 ? ”
“ 결혼하자는 말...정말 진심인거야 ? ”
함께 성관계를 갖고 난 뒤 자신을 책임질수 있냐며 걱정스럽게 물어보았던 서현. 아무래도 그 점은 여전히 못 미더운 모양이다. 근심스럽게 쳐다보는 서현. 승규는 잠시 말이 없다.
“ 글쎄... ”
글쎄라니. 어젠 책임진다 해놓고서 이제와서 말이 달라지는 것인가. 하지만 승규의 심정도 그런대로 이해해야 할 일일 것이다. 어쨌든 서현은 열 일곱 살 어린아이가 아닌가. 여하튼 그녀와 그런 관계까지 가졌으니 책임을 안 질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직 어린 서현에게 “ 그래 ! 결혼하자. 지금 당장 ! ” 이럴수야 없는 노릇 아닌가. 무엇보다 서현은 아직 2년뒤에야 부모님 허락하에 법적으로 결혼이 가능한 나이가 된다.
“ 걱정마 서현아. ”
서현을 안심시켜야 겠기에 승규는 그녀의 손을 다시한번 꼭 잡아본다.
“ 그동안 쭉 지켜봤으면서 오빠 그렇게 못 믿겠어 ? 오빤 오빠가 한 약속은 꼭
지켜. ”
막상 그렇게 말을 하고 나니 승규의 가슴이 다 두근거린다. 정말 이대로 지금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서현이 자신의 나머지 인생의 반려자가 되는것인가. 왕따당하며 살아온 자신의 사춘기 시절, 그리고 대인관계가 원만치 못해 실수가 잦았던 바보같았던 20대 초,중반 시절. 그런 자신의 나약한 면을 알기에 방송작가로 데뷔한 뒤에도 결혼은 생각없노라 누차 말해왔던 승규였다.
그런 승규가 서현앞에선 이렇게 한없이 절제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지만. 이제 서현에게 거듭 구두약속까지 하고나니 단순한 말이 아닌 정말 현실이 되는구나 하는 생각에 승규의 가슴이 떨리고 있는 것이다. 왈칵 눈물이라도 쏟아질것 같은 심정이다.
“ 나...오빠 믿을게. ”
그렇게 말하고 서현은 양 팔로 승규의 목덜미를 감싸안는다. 그리고 승규에게 입을 맞춘다.
“ 사랑해 오빠. ”
“ 그래 서현아. ”
서현의 볼을 한번 어루만져보는 승규.
“ 걱정말고 오빠 믿어. 오빤 오빠가 한 말은 꼭 지킨다니까. ”
“ 정말 그래야돼 오빠. ”
“ 그래, 아무런 걱정하지 말고 어서 들어가라니까. 부모님 걱정하시겠다. ”
어서 집으로 들어가라는 승규의 거듭된 재촉에 서현은 차에서 내린다. 승규와 헤어지는것이 서현은 여전히 못내 아쉬운 것일까.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서현에게 승규는 어서 집으로 들어가란 말을 거듭 하고. 서현은 천천히 집으로 들어간다. 승규는 서현이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난뒤 승규는 자신의 차를 출발시킨다.
(4회에 계속)